2018.01.01
◆ 2018 신년기획 / 한국경제 원로 조순에게 듣다 ◆
조순 전 부총리는 "매달 동료들과 시 모임을 열어 돌아가며 한시를 발표하고 있다"며 새로 발표할 시를 미리 공개했다. 조 전 부총리는 "시 모임은 30년 넘게 매달 이어져 309회째를 앞두고 있는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제 4명만 남았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약천은 그의 호다.
세말감회 歲末感懷
-약천(若泉)
석화거제촉 石火居諸促
미명이출동 未明已出東
여민순편법 黎民馴便法
권병선준공 權柄鮮遵公
노환옹파고 老患翁婆苦
주소도벽공 晝宵禱碧空
사생간일발 死生間一髮
이명갈무궁 爾命曷無窮
세밑의 감회
세월이 석화와 같이 빠르네. 날이 밝기 전인데 이미 동쪽에는 해가 떴네. 백성들은 편법에 익숙하고, 권력층은 공도(公道)를 따르는 일이 적구나.
늙은 내외가 노환으로 고생하며, 밤낮으로 푸른 하늘에 기도하지만, 죽고 사는 것이 한 올 머리카락 차이인 것을, 너의 명이 어찌 무궁할 수 있겠느냐.
새하얀 눈썹을 가진 구순 원로(元老)의 눈동자는 끝을 알 수 없는 연못처럼 깊었다. 차분하고 느린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한국 경제사 한 세기를 담은 깊은 울림이 배어나왔다.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되는 압축적 고속 성장의 신화는 끝난 지 오래라고 진단한 그가 `집중(執中·중용을 잡자)`과 `창신(創新·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자)`을 무술년(戊戌年) 화두로 꺼낼 때 더욱 그랬다.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인 지난달 29일 서울 관악구 자택에서 만난 조순 전 부총리(90) 책상 위에는 여전히 연필로 밑줄을 잔뜩 그어 놓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 중국 인민일보가 놓여 있었다. 글로벌 상황을 끊임없이 따라가며 사고의 맥락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은 `원칙`과 `기본`을 강조하는 인터뷰 답변 속에 그대로 녹아났다. 어느 순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경제학 원론`으로 보면 그 복잡한 문제의 해법도 쉽게 잡혔다.
―지난해 한국은행에서 모처럼 금리를 올릴 정도로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고 있지만 저성장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경기는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경제 성장이란 틀이 확고하게 잡혀 있어야 하는데, 한국의 성장 잠재력이 많이 쇠약해진 것은 분명하다. 성장률 자체는 3%라고 해도, 잠재성장률은 2%대가 옳다고 본다.
―정부가 내세운 소득 주도 성장에 대해 논쟁이 여전하다.
▶소득 주도 성장은 본말이 전도된 개념이다. 국가 경제는 생산을 많이 해야 소득이 늘고, 늘어난 소득이 생산 과정에 투입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소득이 늘면 사람들이 소비를 많이 하게 되고 그것이 자극이 돼 경제가 발전한다는 건 경제 이론에 없다. 단기적이고 오래갈 수가 없다. 내가 볼 때 좋은 생각이 아니다. 자꾸 폐해가 많이 생긴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놓고도 논란이 있다.
▶정부가 할 일이 아닌데 개입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을 올해 16.4%, 몇 년 내로 1만원까지 올리자고 하는데 아주 잘못된 정책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잘못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정부가 지휘해서는 안 된다. 법과 제도를 통해서 기업이 시정하도록 유도하고 관행을 고쳐 나갈 수 있도록 유연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맞는다. 오히려 평균 연봉이 1억원인 노조원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가로막는 노조원이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가능성을 뺏는 것은 옳은 일인지 돌아봐야 한다.
―또다시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이슈로 가는 것 같다.
▶둘 다 중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균형이 잡혀야 한다. 다만 성장과 분배를 어떻게 할 것인지와 소득 주도 성장 이슈는 다른 얘기다. 소득 주도 성장은 분배가 아니다. 분배는 성장을 통해 새롭게 나온 과실을 나누는 것이지만 소득 주도 성장에서 소득은 엄밀히 말해 이전 소득이다. 성장이 아니라 기존에 발생한 소득 중 일부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이동시키는 제로섬(zero―sum) 개념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관(官)보다 민(民)이 앞서는 시대이고, 압축보다는 축적이 중요한 시대다. 성장을 위해서는 민간과 정부의 역할 분담이 중요하다. 기업이 할 수 있는 분야, 민간이 할 수 있는 건 기본적으로 정부가 하면 안 된다. 정부는 경제와 사회 전반에서 발생할 문제를 파악해 미리 대응하며 충격을 줄이는 것이다.
―기업가 정신이 쇠퇴했다고들 한다.
▶기업의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데 우리나라 대기업을 중심으로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이 줄어들고 보수화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그런 면에서는 잘한다. 먼 앞날을 보면서 시스템을 만들고 창업을 독려하고 있다. 중국에는 해귀(海歸)라는 말이 있다.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인데 중국판 실리콘밸리인 중관춘에 자리 잡는다. 의사·변호사·교수가 아니라 사업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다. 정부는 그들에게 그 요람을 만들어준다. 우리 젊은이들이 무기력하다고 비난하면 안 된다.
―반도체 쏠림 현상이 심하다. 중공업은 몇 년째 구조조정 중이고, 자동차도 힘들다. 산업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조순 전 부총리가 기자에게 올해의 화두를 직접 써보이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이 구식으로 머리에 박혀 있다. 자본이나 노동력 같은 생산요소를 끌어 압축적 성장을 하는 시대는 갔다. 자본이 산업이 아니라 지식을 향해 들어가는 `지식자본주의` 사회다. 조선이 어쩌니, 자동차가 어쩌니 하는 것은 옛날 식이다. 지금은 그런 것을 탈피해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생산성을 끌어올려야 한다.
―전 세계가 기업을 끌어안기 위한 정책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현상을 그대로 두고 일종의 제로섬 게임 같은 걸 하고 있는데, 부(富) 생산을 누가 하느냐면 그건 기업이 하는 것이지, 근로자가 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부를 잘 생산하도록 유도하고 부추겨야 한다. 기업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반기업 정서도 만만치 않다.
▶재벌 자체 문제도 있다. 부를 창출하기보다는, 재벌이 오히려 부를 집중하면서 국가 부의 창출을 막은 측면이 있다. 거기에서 반기업 정서가 생긴 것이다.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근심거리를 꼽는다면 저출산이다. 일본처럼 인구가 줄기 시작하면 경제가 성장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어떻게 풀어야 하나.
▶보육지원금 같은 돈을 주는 정책은 아주 단기적 방법일 뿐이다. 근본적 원인은 경쟁만 강조하는 한국 교육에 문제가 있다. 지성이나 감성이나 정서는 뒷전이다. 명문대를 가서 변호사나 교수 같은 직장을 가지거나 돈을 많이 벌어 출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뿐이다. 그런 걸 의식하면 애를 낳을 수가 없게 된다.
―북핵과 통상 이슈 등으로 한국 외교가 힘든 상황이다.
▶정부가 대외관계에서 가장 하면 안 될 것이 단기적으로 그때그때 대응하는 것이다. 정부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나중에 감당할 수가 있는지 이걸 먼저 생각을 해봐야 한다. 전 정부 결정을 함부로 뒤집어선 안 된다. 장기적인 국제사회의 신뢰가 중요하다.
■ 올해 나의 화두는 執中
치우침없이 중심잡자는 의미…국가적으론 `創新` 꼽고싶어
올해로 구순을 맞이한 조순 전 부총리에게 더 늦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봤다. 조 전 부총리는 "외형적으로 뭘 하고 싶겠냐"면서도 "글쎄 좀 이건 아무리 원해도 잘 안 되는 거지만, 눈과 귀가 어두워지지 말고 지금 정도라도 유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좀 더 집중하고 싶고, 끝까지 배우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그가 올해 화두로 제시한 `집중(執中)`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한국 사회가 좀 더 어른스러움과 성숙함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느껴졌다.
―새해 개인적인 화두는 어떤 건가.
▶나 자신의 개인 화두는 `집중`이다. 문제에 집중(集中)해서 연구하고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잡을 집`에 `중용의 중`을 쓴 것이다. `執中`(한자로 쓰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중용을 잡는다는 의미다. 결국 아주 정성스럽게 해서 극한으로 가지 말고 중심을 잡는다는 거다. 내가 이제 한국 나이로 아흔한 살이다. 좀 더 어른다워야 하지 않겠나.
―국가적인 화두는 무엇이 돼야 하겠나.
▶아무래도 `창신(創新)` 아닐까. 창신, 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보수적인데, 바꿔나가야 한다.
―자본주의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아직도 포기는 안 하는데 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굉장히 위태롭고 위기라고 본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되겠는데,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자꾸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굳이 책으로 써야 하나, 그러지 않아도 우울한데 내가 앞장서서 그런 얘기를 왜 하느냐는 생각이 든다.
―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까지 다 해보셨는데 뭐가 가장 보람 있었나.
▶서울시장일 때가 제일 유쾌했다. 그다음은 한국은행 총재인데 나갈 때 한국은행 모든 사람이 도열했던 일이 기억난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부총리를 했는데 여소야대라 많이 시달렸다. 서울시장 때 여의도공원을 비롯해 공원을 많이 만들었다. 내가 서울시장을 좀 더 했으면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사실 서울시장 당선 축하 자리에 갔다가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듣고 바로 현장에 달려갔고, 그 자리에서 최병렬 전 시장에게 인계도 받았다.
■ 조순 前 부총리는…
△1928년 강원도 강릉 출생 △서울대 상과대 졸업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대학원 경제학 박사 △미국 뉴햄프셔대 조교수 △서울대 상과대 교수 △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제17대 경제기획원 장관(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이화여대 석좌교수 △제30대 서울시장(민선1기) △제4대 민주당 총재 △제1·2대 한나라당 총재 △제15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송성훈 기자 / 김인오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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