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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미뤄온 기업 구조조정 on] [1] 경제 활력 떨어뜨리는 부실기업
3년 연속 적자·자본잠식 기업 적자 7조, 차입금만 52조 달해
정상기업은 직원수 10.8% 증가 "늦은 만큼 최대한 속도 내야"
중소 운수업체 A사는 2012년 사업을 키우면서 700억원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 은행은 '건실한 회사'라고 판정했지만, 1년도 안 돼 문제가 생겼다. 사업 확장에 실패하면서 2013년부터 회사가 급속도로 부실해졌다. 은행에서는 부실 대출로 처리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7차례나 대출을 연장해줬다. 현재 A사의 부채 비율은 1500%를 넘는다. 대출 연장 없이는 회사 존립이 불가능하다. 전형적인 좀비(Zombi·살아있는 시체)기업이다. 은행 관계자는 "A사의 회생 가능성은 1%도 안 된다. 그저 문제를 덮어두고 시간을 끌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2012년부터 3년 연속 적자를 낸 코스닥 상장 게임업체 B사도 마찬가지다. 한때 북미·일본 지역에 진출하는 히트작을 만든 기업이지만, 후속작을 내지 못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지난 6월에는 100억원 정도의 대출 연장을 위해 은행과 금융권 관계자들에게 백방으로 하소연해서 어렵게 대출 만기를 연장했지만, 재기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 업계 평가다.
경기 침체로 늘어나는 이런 좀비기업들이 한국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일자리를 잡아먹고 있다.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뜨렸는데, 역설적으로 좀비기업을 연명시켜 경기 회생을 더 지연시키는 구조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제대로 된 기업 구조조정을 미뤄온 정부가 뒤늦게 좀비기업 퇴출에 나서겠다고 했다.
◇금융 당국, 좀비기업 최대 800개로 본다
한국은행 금융안정 보고서에 따르면, 3년 이상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부실기업은 2009년 2698개에서 지난해 3295개로 늘었다. 국내 500대 기업 가운데 10%에 달하는 49개사가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기업 가운데 정부가 퇴출 대상으로 보는 이른바 '좀비기업'은 최대 800개 정도로 압축된다. 금융 당국은 '3년 연속 적자와 자본 잠식을 기록한 기업'은 회생이 힘들 것으로 보고 퇴출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이 기준에 따라 본지가 금융투자분석업체 에프엔가이드에 의뢰해 분석했더니, 전체 외부감사 대상 기업(자산 120억원 이상) 2만4000여개 가운데 793개가 이런 상황에 빠져 있었다. 이들의 적자 규모는 2012년 7조2775억원에서 지난해 7조262억원이었으며, 같은 기간 자본 잠식 규모는 38조5884억원에서 49조1955억원으로 늘었다. 이들이 금융권에서 빌려 쓴 돈은 52조원에 달하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된 셈이어서 은행이 돌려받을 길이 막막하다.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이런 기업들은 일자리 확대에도 찬물을 끼얹는다. 금융업종을 제외한 코스피·코스닥 상장사 1009개 중에 3년 연속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갚지 못하는 기업은 234개다. 이들 기업의 직원 숫자는 2012년 11만2354명에서 올 6월 10만1457명으로 감소했다. 3년 반 사이에 직원 수가 9.7% 줄어 일자리 1만897개가 사라졌다. 이들과 달리 정상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775개사는 같은 기간 직원 수가 10.8% 늘었다. 일자리가 줄어든 이들 부실기업이 정상기업 수준의 직원 증가율을 보였다면 1만2134명의 새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셈이다.
◇뒷북치는 정부와 대형 은행들
금융 당국은 "비생산적인 자금 흐름을 차단해 경제 활력을 높이겠다"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기업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겠다고 했다. 연말까지 대기업을 포함한 구조조정 대상 기업을 선정한다는 계획이다. 내년 초부터 부실 중견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대기업 계열사 등에 대해서는 내년 총선 일정 등을 감안할 예정이다.
정부의 이번 구조조정은 늦을 대로 늦은 만큼 최대한 속도를 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정한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부실기업 정리가 더 늦어지면 한국 경제가 헤어나기 어려운 수렁에 빠진다"면서 "이번 구조조정은 살아나기 어려운 좀비기업을 워크아웃으로 연명시키는 미봉책이 아니라 문 닫도록 해서 경제에 새살이 돋도록 단호하게 감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구조조정을 하면 일시적으로 매출 하락, 고용 불안 등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구조조정을 미뤄온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구조조정 방식도 관건이다. 그동안 정부가 휘둘렀던 구조조정의 칼은 부도 직전에야 청와대 서별관회의(경제금융점검회의) 등에서 일방통행식으로 정해지는 방식이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채권은행들이 정부가 나서기 전에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아 실기(失機)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단순히 기업 워크아웃을 늘리는 재래식 해법으로는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다. 기업들의 워크아웃 졸업률은 지난 2000년 100%에서 2005년 75%, 2010년 24.3%로 떨어진 이후, 지난해엔 20% 미만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