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산운용.펀드시장

`갑옷 벗은 검투사` 황영기 前 금융투자협회장. 우리 연기금 4000조~5000조원 바탕.자산운용업이 가장 글로벌화 가능성이 높은 업종.

Bonjour Kwon 2018. 2. 23. 08:09

2018.02.20

"금융허브 한국?…글로벌 고객 쫓는 `사나운 개`부터 없애야"

 

원본보기

"제대한다고 너무 세게 얘기하는 것 아니냐고요? 현직에 있을 때 못했던 말을 한 것뿐인데."

 

이달 초 금융투자협회장 자리에서 물러난 황영기 전 금투협회장은 진작부터 '검투사'로 불렸다. 가을걷이를 위해 씨를 뿌리고 김매고 기다리는 것은 도무지 황영기 스타일이 아니다. 평소 어슬렁어슬렁 다니다가도 먹잇감을 보는 순간 잘 닦아 놓은 칼을 뽑아 확 낚아채고 마는 검객. 그런 일이 오히려 그에게 걸맞다.

 

'기울어진 운동장론(論)'을 내세워 금융투자업을 은행업과 정면 충돌하게 하고, 규제 때문에 금융업에 발전이 없다고 쓴소리를 하던 그가 옷섶에 칼을 집어넣고 이달 초 홀연 강호를 떠났다. 금투협회장 연임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지난해 12월부터 현 정부에 날 선 비판을 쏟아내자 그의 주변에서는 정치하려는 것 아니냐는 소문도 무성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를 하기에는)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다"며 "조선시대 이후 내려온 우리나라 관료제에 대한 책을 써보고 싶은데 실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지난 연말 금투협회장 자리를 연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정부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나는 나름대로 굉장히 절제해서 한 말이었다. 잘한 건 잘한다 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한 것뿐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 어렵지 않나. 금융지주사 사장, 회장들이 지금 아무 생각이 없어서 말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떠나는 사람 입장에서 문제를 일단 솔직하게 얘기한 건데 그걸 세다고 얘기하다니.

 

―그래도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있을 거란 말도 있고. 예전부터 말은 있지 않았나.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다. 그런 대답을 수없이 해왔다.

 

―예전부터 관료제에 대한 책을 써보고 싶다고 했는데.

 

▷공부할 여력이 있다면 대한민국 관료의 역사를 한번 다뤄보고 싶었다. 책 제목은 그냥 '관료'. 조선 왕조의 이념과 제도를 설계한 정도전 이후 관료제는 근간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백성을 근본으로 하고 왕과 신하가 균형을 맞추는 이상적인 나라를 꿈꿨을 텐데 일제강점기와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관료제는 변질됐다. 지금도 사농공상은 살아 있는데 '사(士)' 때문에 대한민국이 침체됐다. 민중의 생활에서 사농공상을 바라보면서 확 뜯어고쳐야 할 곳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존경하는 관료는.

 

▷없다. 민간 기업은 늘 시장에서 평가를 받는다. 경쟁에서 도태되면 시장에서 알아서 정리되기도 한다. 경쟁력 없는 제품을 만들면 소비자가 판단해 시장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시장에는 늘 경쟁이 살아 있고 경쟁으로 희비가 가려진다. 그런데 경쟁이 없는 집단이 하나 있다. 그게 바로 관료다. 일단 공무원이 되고 나면 경쟁이 사라진다. 정책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된다. 공무원 스스로 되돌아보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은행, 증권 등 안 해본 곳이 없는데 어디가 가장 정이 많이 가나.

 

▷당연히 금융투자업이다. 금융투자업이야말로 한국 금융업계에서 유일하게 글로벌한 기업이 나올 수 있는 분야다. 옛날 봉건사회에서 장남은 농사짓느라 시골을 못 떠나지만 막내가 대신 서울로 유학을 가서 훌륭하게 크는 격이라고 할까. 은행과 보험업은 국가의 금융 시스템을 받쳐줘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정말 많은 규제가 있다. 또 그만큼 업계도 규제에 순치돼 있다. 업의 중요성 때문에 기득권이 보호되고 있다. 시장과 관(官)이 적절하게 맞물려 있는 업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금융투자업은 자본시장법으로 규정한다. 기본적으로 진입에 대한 자격만 갖추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훨씬 다이내믹하다. 혁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자산운용업이 가장 글로벌화 가능성이 높은 업종이라고 수년째 강조해왔는데.

 

▷나는 예전부터 우리나라 금융업의 삼성전자는 자산운용업에서 나올 거라고 믿어왔다. 프로 농구·배구·야구에 용병들이 들어와 뛰는 것을 봐라. 처음에는 토종들 씨 말린다고 비판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결국 우리나라 선수들도 메이저리그로 가지 않았나. 자산운용업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국민도 해외 투자를 해보고 하면 우리나라 자산운용시장이 글로벌 시장으로 클 수 있다는 걸 시장이나 투자자 모두 직감하게 될 것이다. 일단 우리나라 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 등 연기금에서 운용하는 자금만 해도 4000조~5000조원이 된다. 이 돈을 근간으로 해서 차이나머니로까지 발판을 넓힌다면 해외 자금을 국내로 들여와 우리나라에서 자산운용업을 키울 수 있다. 한국을 자산운용업ㄷ의 허브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홍콩과 싱가포르 등이 아시아 자산운용 허브 노릇을 하고 있지 않나.

 

▷한국이 훨씬 낫다. 아시아 자산운용 헤드쿼터를 만들고 싶어하는 금융기업이 있는데 싱가포르, 홍콩, 서울 중 어디에 가고 싶으냐고 하면 다들 서울이 좋다고 한다. 홍콩은 공해도 너무 심하고 생활 환경이 급격히 저하됐다. 싱가포르는 기후도 좋지 않고, 음식이나 생활 등이 서울이 훨씬 낫다고 평가받는다. 글로벌 금융기업들이 서울에 헤드쿼터를 두면 한국에서 운용할 수 있는 자본시장 규모가 커질 뿐만 아니라 일본 도쿄와 중국 상하이 등 주변 금융허브를 2~3시간 내에 커버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도 서울만 한 데가 없다. 자산운용업을 글로벌하게 키우려면 외국의 금융인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싶게 해야 한다. 쉽게 말해 여의도 바닥에 20~30% 외국인이 돌아다녀야 자산운용 허브가 되는 것이다.

 

―말씀대로라면 한국이 벌써 금융허브가 됐어야 하는데 왜 안 되고 있는 건가.

 

▷몇 해 전 한국을 국제금융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회의에 참석해 '맹구주산(猛狗酒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중국 송나라 때 한 마을에 술을 잘 빚는 노파가 있어서 그 집에는 술을 받으러 오는 손님이 줄을 섰다. 노파는 본격적으로 주막을 차리고 맛있는 술과 안주를 준비해뒀는데 막상 번듯한 가게를 냈더니 그 많던 손님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마을 어른을 찾아가 왜 이렇게 장사가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노파에게 "가게 앞에 개를 매어 놨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술을 훔쳐 갈까봐 개를 묶어 놨던 게 화근이었다. 사나운 개가 있으면 술이 쉰다. 개를 없앴더니 술 취한 사람도 들어오고 다시 장사가 잘됐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는 좋은 술이 있는 나라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산업 기반이 튼튼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금융 토양도 비옥하다. 그런데 자꾸 술이 쉬고 있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사나운 무리 중 하나가 금융규제다. 규제를 완화하고 개방적인 정책을 써야 하는데 규제 당국이 이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 한국 금투업계 미래비전 담은 '황의 보고서' 남겨

 

 

―최근에는 JP모건, UBS 등 외국계 자산운용사가 스스로 한국 시장에서 짐 싸서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것도 규제 때문인가.

 

▷금융산업이 느린 것 같지만 잘될 때는 연간 30%씩 성장할 정도로 매우 빠르게 성장한다. 이때 잘나가는 경쟁자들은 50~100%씩 성장한다. 하지만 산업이 커지고 참가자들이 우당탕 늘어나다가 그 먼지가 가라앉고 나면 반도 살아남지 못하는 게 금융업이다. 지금 우리 자산운용이 그런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시장은 엄청나게 커지고 있고 업권에 진입하는 경쟁자들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국내 자산운용사들과의 경쟁에 못 이겨서 스스로 떠나는 외국계들도 생겨나고 있다. 그게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한국 주식 운용은 한국투자, 미래에셋 등 엄청난 선수들이 있는데 외국계가 당해낼 수가 없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운용사가 직원 몇 명을 파견해 뉴욕에서 블랙록보다 주식 운용을 잘하겠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금이 중요하다. 이들 외국계 운용사들이 짐 싸서 나갈 게 아니라 국내 주식도 일부 하면서 아시아 주식을 한국에서 운용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안타까운 것이다. 한국이 강한 아시아 정보기술(IT)주, 아시아 바이오주 등은 펀드매니저 애널리스트 등이 서울에 머물면서 글로벌 주식운용을 여기서 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된다. 이들 외국인과 제대로 경쟁할 수 있는 규제 토양만 만들어지면 앞으로 10~20년 후 홍콩의 자산 운용 비즈니스는 상당 부분 한국으로 넘어와 있을 것이다.

 

―지난해 증권업계 발전방안을 100가지로 정리한 100대 과제가 소위 '황의 보고서'로 남아 있다. 앞으로 누가 이 일을 하더라도 금투업계는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미래 비전을 정리해둔 것 같던데 후임자를 위한 조언 같은 거였나.

 

▷금융투자협회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업계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차제에 큰 그림에서 국가 발전을 위해 증권업이 할 수 있는 방향성을 설정해보고 싶었다.

 

이 일을 내가 하든, 누가 하든지 앞으로 5~10년간 할 과제를 추려보자고 했던 것이다. 결국 100대 과제는 너무 많다 싶어서 30대 핵심 과제를 추렸고 이를 관계기관에 모두 알렸다. '하고 싶다'는 건 계획이 아니라 꿈이다. 누가 언제까지 얼마의 예산으로 할지가 붙어야 '계획'이 된다. 이 과제들에는 실행계획표가 붙어 있다. 공공 이익을 위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실행계획이 됐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다.

 

■ He is…

 

△1952년 경북 영덕 출생 △1971년 서울고 졸업 △1975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81년 영국 런던정경대 석사 △1975년 삼성물산 입사 △1989년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1999년 삼성투자신탁운용 사장 △2001년 삼성증권 사장 △2004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2008년 KB금융지주 회장 △2010년 차병원그룹 부회장 △2012년 법무법인 세종 고문 △2015~2018년 2월 제3대 한국금융투자협회장

 

[한예경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