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Interview] 35년간 7번 이상 `무탈한 동업`…젊은 세대와 창업DNA 공유하는 김병태 소바젠 대표
2019.02.15
고교 동창들과 지도제작…
오페라 강의듣다 강사와 아카데미…
주치의와는 바이오社 창업
"세상의 모든 것과 동업하라" 외치는 61세 현역
"한 우물만 파란법 있나요? 빨리 새 우물 찾는것도 중요"
대학 시절 국내 최초 전국도로지도를 제작하면서 사업을 시작해 바이오업체 대표로 있는 지금까지 모든 사업을 동업으로 성공시킨 김병태 소바젠 대표가 경기도 판교 사무실 계단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재훈 기자]
`동업은 형제 하고도 하지 말라`는 말이 금과옥조처럼 통용되는 나라에서 "회갑 나이가 되면 잔치하지 말고 동업을 시작하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 은퇴했다고 경륜과 자산을 썩히지 말고 그것이 절실한 젊은 세대와 창업을 하라는 주장이다.
대학원생이었던 1985년 한국 최초로 전국도로지도를 만들어 대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평생을 창업 DNA로 살아온 김병태 씨(61)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창업사(史)에는 주목할 만한 특징이 하나 있다.
모든 창업이 동업이었다는 점이다. 지도출판사를 시작으로 글로벌여행사, 공유오피스, 비즈니스호텔, 록페스티벌, 클래식아카데미 등을 창업했고 공기업 사장을 거쳐 현재 바이오 업체인 소바젠 대표로 있는 김병태 대표를 만났다. `세상 모든 것과 동업해야 한다`는 그의 개성 있는 인생철학과 흥미진진한 창업 스토리를 들었다.
―한국 최초로 전국도로지도를 만들었는데.
▷1983년 대학원 다닐 때 독일에서 온 교환학생과 친하게 지냈다. 그 친구가 여행을 한다며 한국 도로지도를 사달라고 했다. 교보문고에 갔더니 지형도만 있고 도로지도가 없었다. 그 친구가 자신이 가지고 온 독일 도로지도를 보여줬다. 그걸 본 순간 느낌이 왔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가치가 있어 보였다. 고등학교 동창 두 명을 설득해서 사업을 시작했다. 제작에만 2년이 걸렸다.
―선례나 모델이 없었을 텐데 도로지도 만드는 게 쉽지 않았겠다.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지도 제작은 국립지리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상식도 모르고 뛰어들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허가를 얻기 위해 담당 공무원 집앞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리고 일단 컴퓨터가 없으니 모든 걸 일일이 수작업으로 해야 했다. 전국 주요 도시 사거리를 다 가보고 좌회전 우회전 표시를 했다. 보통 직장인 월급이 30만원이던 시절 제작비만 7000만원이 들어갔다.
―처음부터 잘 팔렸나.
▷아니다. 큰 빚을 지고 시작한 일인데 처음에는 안 팔렸다. 하루에 한두 권밖에 안 나가니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일단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도자료를 만들어 신문사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언론사에서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을 한 20대 청년들`이라는 테마로 기사가 나왔다. 그 기사가 나간 후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현대판 김정호`라고 9시 뉴스에 나올 정도였다. 불과 몇 달 안 되어서 50쇄를 찍었다. 그 돈으로 빚 갚고 방배동에 아파트를 샀다.
―그런데 잘되는 지도출판사는 왜 그만뒀나.
▷도로지도책을 내고 6개월 후에 교보에 가봤는데 지도책 매대가 따로 생길 정도로 많은 도로지도가 나와 있었다. 회사들이 전부 도로지도에 뛰어든 것이었다. 몇 달 지나니 돈을 버는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걸 보고 또 다른 일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때 지도 업계를 안 나왔다면 지금 구글이나 내비게이션을 상대해야 하는 고난을 겪고 있었을 거다(웃음).
사람들은 한 우물을 파라고 하는데 난 한 우물 안 판다. 어디에 물이 나오는지 빨리 알아보고, 내 우물이 마르기 전에 다른 우물을 파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도 제작을 그만두고 무슨 일에 뛰어들었나.
▷여행을 좋아해서 여행사에 취직했다. 당시 여행사는 비행기표를 미리 확보해놓을 수 없는 구조였다. 보증할 역량이 없어서였다. 그때 보증보험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래서 보증보험을 찾아가 사장을 만나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자기들 힘으로는 안 되니 재무부 보험감독과를 찾아가라고 했다. 당시 재무부 담당자를 설득해서 보험증서를 받아냈다. 여행사 일개 과장이 나를 찾아왔다는 게 신선하다며 증서를 만들어줬다. 7년 만에 대표이사가 됐다. 외국인과 기업 고객에 초점을 맞춰 경영했다. BT&I라는 여행사였는데 나중에 상장해서 SM에 팔렸다.
―공유오피스 사업도 했는데.
▷여행사를 하면서 1999년 공유오피스 사업을 처음 시도했다. 한국과 비즈니스를 하려는 외국인들이 많이 늘어날 때였다. 좋은 위치와 시설, 영어 서비스가 되는 오피스를 차리면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남 포스코빌딩 한 층을 통째로 빌려서 칸막이를 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석 달 만에 전체 공간이 꽉 찼다. 사정상 동업자에게 넘기고 그 일에서 금방 빠져나왔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때 그 회사 명함을 들고 있었다. 내가 만든 조직이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니 행복했다. 이것이 돈을 벌고, 못 벌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다.
빌딩 소유주로 빌딩 경영도 해봤다. IMF 때 자산유동화 회사를 만들어서 돈을 모아 동업으로 부산에 고려증권빌딩을 인수했다. 그 자리에 증권거래소를 유치했다. 빌딩 경영은 참 무섭더라. 비었을 때는 수억 적자를 보고, 임대가 되면 수억씩 이득이 나는 사업이더라. 또 다른 세계를 배웠다.
―그러다 갑자기 문화사업을 시작했다.
▷나이가 50이 되니까 서비스사업을 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문화사업을 하고 싶었다. 글로벌 여행사를 하면서 느낀 건데 외국 기업인들은 비즈니스가 목적인 자리가 아닌 이상 일 이야기를 안 하더라. 클래식, 미술, 문학 이런 이야기만 하더라. 그걸 보면서 우리는 영어만 달리는 게 아니라 교양지수가 달린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가장 교양 있는 비즈니스맨`이 되기로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 무렵 의사이자 오페라평론가인 풍월당 박종호 씨의 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들으며 오페라 하나에 모든 문화와 교양이 담겨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느낌이 왔다. 박씨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당시 풍월당은 작은 업체였다. 콘텐츠는 박 대표가 맡고, 경영은 내가 하기로 했다. 압구정동에 강의장을 만들고 `CEO 오페라 클래스`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40명 모으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한 학기가 끝나자 수강하던 사람의 90%가 재등록을 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강의실에 자리가 모자라기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계에 큰 혁신을 가져왔다고 자부한다.
―록페스티벌에도 관여하고, 비즈니스호텔 사업도 했는데.
▷그렇다. 조카가 지산리조트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록페스티벌을 키우고 싶다고 도움을 요청해왔다. 위치가 좋아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산 록페스티벌에 문화를 더 넣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팝아트 전시회를 같이 넣었다. 마리킴, 아트놈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걸었다. 대성공을 했다. 이틀 만에 8만8000명이 전시를 봤다. 전시회 역사상 단일 기간 최고 기록이었다. 록페스티벌과 전시의 협업이 만든 결과였다. 그런 시도가 잘되면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2010년 무렵엔 비즈니스호텔 사업에도 투자했다. 전남 영암에서 F1 그랑프리 경기가 열렸는데 좋은 숙소가 없어 문제가 많았다. 그때 아이디어를 냈다. 규모가 작더라도 깨끗한 숙소에서 시트만 잘 갈아줘도 외국인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 식당은 흔하니까 잠만 해결되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동업자를 모아 군산 경주 이런 곳에 비즈니스호텔 체인을 했다. 그랬더니 그 일대 모든 호텔이 우리의 `깨끗한 전략`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 사업으로 돈은 크게 벌지 못했지만 나름의 역할은 한 거다.
―개인 사업에 매진하다 공기업 사장이 된 계기는.
▷서울관광마케팅 사장을 뽑을 때 주변에서 응모하라고 했다.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돌파력 있는 사람이 필요해 보였고, 내가 그 역할을 하고 싶었다. 서울시를 전 세계에 잘 홍보하는 게 일이었다.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그들과 서울시를 잘 연계하는 게 일이었다. 잘했다고 자부한다. 서울시 관광패스를 처음 만들었다. 패스 한 장으로 관광지를 다 다닐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 가도 있는데 우리만 없었다. 4대 궁은 국가 소관, 남산은 서울시 이런 식으로 나뉘어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시, 문화재청 관계자 모두를 1대1로 면담하면서 일을 추진했다.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오랫동안 서울시민으로 살아왔는데, 서울시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은 바이오 회사 대표다. 좀 뜻밖인데.
▷서울관광마케팅 사장 2년 차일 때 몸이 안 좋았다. 상태가 심각해서 병원에 다니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바이오에 관심을 갖게 됐다. 뉴욕과 런던 VIP들은 몸에 문제가 발견되면 DNA 검사부터 한다고 한다. 유전 때문인지 외부적 요인 때문인지 등을 분석해 적절한 치료를 하는 것이다. 가족력인지 바이러스가 침입했는지를 보고 방사능 항암치료 여부 등이 결정된다. 하지만 우리는 병변을 도려내는 수준의 치료를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한 바이오 사업을 하고 싶었다. 퇴원할 무렵 나와 내 주치의, 그리고 카이스트 교수이기도 한 다른 의사, 이렇게 세 명이 의기투합했다. 나는 2대 주주이고 경영을 맡고 있다. 환자를 보는 의사, 연구하는 의사, 경영자 이렇게 세 명이 동업을 시작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
▷난치성 뇌질환 치료제를 개발하는 사업이다. 난치성 뇌종양(교모세포종) 원인을 세계 최초로 밝힌(2018년 네이처메디신 게재) 바이오 벤처다. 난치성 뇌질환은 증상에 따라 완화시키는 약만 쓸 뿐 원인을 치료하는 약은 없다. 우리 연구팀은 6년간 1500명 환자의 뇌를 분석했다. 회임기간이 긴 사업이지만 악성 뇌종양과 뇌전증의 원인을 알아냈기 때문에 큰 산은 넘은 셈이다. 인정받은 기술로 회사를 만들었기 때문에 기대가 크다. 투자받기도 어렵지 않았다. 주변에서 회사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대부분 사업을 동업으로 한 것인가.
▷소바젠은 아파서 병원에 갔다가 의사들과 동업을 한 거다. 난 그래 왔다. 강의를 듣다가 강사를 하고, 동업을 했고, 집안 모임에 갔다가 집안 형님과 조카와 동업을 했다. 동창회에 가면 동창과 동업을 시작했다. 삶 곳곳에 내 사업 파트너가 있다. 이것들이 결국 기회다.
난 뭐든지 남들과 똑같이 안 하려고 노력한다. 식사를 주문할 때도 안 먹어 본 것을 시키는 걸 좋아한다.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한다.
여행사를 할 때 예를 들면 이렇다. 세상에 여행 안 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분야 사람들이 내 고객이었다. 난 그들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해주고 그 대가로 그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그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모르는 세상을 배웠다. 그들이 나의 동업자가 되기도 했다. 나는 거의 매일 저녁 사람을 만났다. 그 인연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삶의 골목마다 사업 기회는 기다리고 있다.
―동업은 형제와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
▷동업은 형제하고도 하지 말라는 말은 내가 보기엔 틀린 말이다. 세상 모든 것과 동업해야 한다. 생각해보라, 주식회사가 결국은 동업이다. 인류 최고 발명품이 주식회사라고 하는데 그게 결국 동업 아닌가. 그걸 하지 말라는 말이 나는 이해가 안 된다. 난 제너럴리스트다. 내게는 스페셜리스트가 필요했다. 그래서 동업을 했다. 동업이 즐거웠고 나의 성공 비결이 됐다.
예전에는 보증 문제, 인감도장 이런 것 때문에 분쟁이 많이 생겼다. 지금은 다르다. 뭐든지 확인할 수 있고, 법적으로 확실하게 해놓을 수 있는 수단이 많다.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업을 조심하라는 건 집문서가 종이로만 존재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사업은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가 함께해야 성공한다. 과학자들만이 회사를 차린다고 해보자. 내 기술이 세계 최고라는 생각만으로는 사업을 할 수 없다. 회사를 경영하고 투자자를 모으는 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 여자와 남자. 동업자 구성이 이런 식이면 더욱 좋다.
―동업의 개념을 누구에게 배웠나.
▷누님과 형님들이 나의 최초 스승이자 동업자였다. 오늘의 나를 만든 건 나의 가족들이다. 나는 대단히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고,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7남매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것이 천운이었다. 누나 형 매형 형수 등 나보다 세상을 먼저 걸어간 분들을 보면서 인생을 배웠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협업을 배웠다. 큰누나와 나는 17년 차이가 난다. 큰누나를 보면서 17년의 선행학습을 한 것이다. 7남매가 뒤엉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젠더지수 감성지수 문화지수 등이 발달했다. 무슨 사업을 해도 보증이 필요하던 시절 매형은 선뜻 나의 보증인이 되어줬다.
―동업을 하다 보면 갈등이 있을 텐데, 그것을 극복하는 비결은.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반드시 갈등이 온다. 이때 무조건 양보하면 된다. 동업 파트너에게 양보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반드시 새로운 사업 기회가 찾아왔다. 동업했던 파트너와 죽기 살기로 싸워 이긴 것은 이긴 게 아니다. 반대로 양보하고 나오면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른 사업 파트너가 찾아온다. 당신이라면 사업 파트너와 아귀다툼을 벌인 사람과 사업을 하겠는가, 아니면 양보한 사람과 사업을 하겠는가.
―`회갑 때 잔치를 하지 말고 동업을 시작하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설명을 좀 해달라.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은퇴자인 시대가 오고 있다. 한 사람이 한 명 이상을 먹여 살려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50·60대도 무조건 일을 해야 한다. 은퇴했다고 손을 놓고 있으면 안 된다. 벌어놓은 돈을 죽을 때까지 까먹으면서 살면 안 된다. 자산과 경험의 일부를 떼어서 어려운 삼포세대 청년들과 동업을 하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100세 시대에 맞는 행동이다. 말만 100세 시대고, 행동은 60세에 죽던 시절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은퇴자들도 벤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장 모교를 찾아가서 젊은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그게 우리 세대가 할 일이다. 벌어놓은 돈으로 산에나 가는 건 아니다. 맨날 당구나 치고 바둑만 두지 말고 젊은이들과 동업을 하라고 말한다. 당구 치고 바둑 둘 거면 차라리 당구장을 차리고 기원을 차려야 한다. 한 공간에 당구장과 기원을 같이 해도 좋다. 이처럼 진취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젊은 세대와 동업하는 것은 재능 기부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 은퇴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멘티를 찾아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 권역별·직종별로 멘토링을 해야 한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
―어린 시절이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려달라.
1958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서울에 올라왔다. 난 행동주의자다. 고등학교 졸업 때 쓴 글을 보니까. `행동 없이는 결과도 없다. 일단 돛을 올리고 떠나자` 이렇게 썼더라. 직업도 사업도 여행이다. 한 가지만 하고 가기에는 아쉽지 않은가. 사실 국문과에 가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재능이 없다며 반대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생물을 전공했는데 나와는 맞지 않았다. 창업이 천성이었던 것 같다.
―끊임없는 전업(轉業)을 반대한 사람이 많았을 것 같은데.
▷여태까지 내가 한 모든 일에 찬성한 사람은 드물었다. 풍월당 할 때는 음악시장에서 돈 번 사람이 누가 있느냐며 반대했고, 여행사 할 때는 푼돈밖에 못 번다고 반대했다. 공기업 사장 할 때는 공조직을 쉽게 보지 말라며 반대했다. 이번에 소바젠은 나이 60세에 경험도 없는 사람이 무슨 바이오 벤처냐고 말렸다. 평생 말리는 사람만 있었다. 하지만 말리는 사람에게 말리면 안 된다. 결국 나는 내 길을 갔다.
―사업 하면서 가장 중요시하는 게 뭔가.
▷난 명분이 중요하다. 명분 없으면 손을 안 댄다. 명분 있는 사업을 해야 혹시 안 돼도 뭔가 남는다. 명분이 있으면 망해도 반은 건진다. 명분 없는 사업을 하다 망하면 다 망하는 거다. 명분 있는 사업이 망하면 재기할 때도 도움이 된다. 사람들이 누구와 사업을 하고 싶어 하겠는가. 국내 최초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다가 망한 사람과 하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첫` 사업을 많이 한 건가.
▷그렇다. 내가 사업을 시작할 때 가장 중시한 것 중 하나가 호기심이다. 호기심을 유발하는 일을 하다 보니까 `첫`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일을 많이 하게 됐다.
―망한 적이 있는가.
▷물론 있다. 가장 크게 망한 게 프로야구가 처음 도입됐을 때 야구공을 만들어 구단에 납품하는 회사였다. 해보니 내 역할과 명분이 없는 사업이었다. 야구공 만드는 회사는 꽤 있었고, 야구선수 출신인 동창이 제조·판매·경영까지 다 했기 때문에 내 역할이 없었다. 그 사업을 경험한 이후 내 역할이 명확하지 않은 사업은 하지 않았다.
내 사업 철학은 `열정은 올인, 자금은 반만`이다. 나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래야 다음 사업을 할 수 있으니까.
―좀 쉬고 싶지 않은가.
▷내 호가 우아(又我)다. 인생은 또 다른 나와의 갈등이다. 내 안에서는 소바젠을 하고 싶은 나와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싶은 내가 갈등한다. 그 갈등 속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고 그것을 하겠다는 의지다. 나는 인생 초반전에 수많은 어려운 일을 겪었다. 솔직히 말해 사업은 갈수록 쉬워진다.
―아버지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우성 김종영 선생이다. 아버지에게서 무엇을 배웠나.
▷아버지는 모두가 구상미술에 함몰돼 있던 1960·1970년대 추상예술에 도전한 분이다. 동양과 서양의 정신을 융합한 의미 있는 작품을 많이 남기셨지만 당대 평가에 연연하지 않으셨다. 개인전도 회갑을 넘기고서야 여셨다. 나는 아버지의 도전정신을 좋아했다. 내가 융합 아이디어로 사업을 많이 한 것도 그 영향이 컸다.
물론 대학교수이자 예술가였던 아버지와 내 인생은 다르다. 아버지는 `내가 죽고 나면 언제가 세상이 나를 알아주겠지` 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사업가였기 때문에 살아서 당대에 인정받아야 했다.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세대에게 사업으로 성공하는 비결을 알려준다면.
▷말과 생각과 취미, 심지어 복장도 최고경영자(CEO)처럼 해라. 내가 다니는 동선에 있는 영업장마다 내가 사장이었으면 하는 상상을 해보라. 그리고 나 같으면 어떻게 경영할지 생각하라. 임대료도 알아보고 그 분야 톱클래스가 어딘지도 알아봐라.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을 사귀어라.
―좌우명이 있는가.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라는 다섯 글자를 늘 가슴에 새기고 산다. 선과 악, 즉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인생사에는 이 두 가지가 항상 묘하게 얽혀 있다. 어떤 경우엔 과정은 나쁘나 결과가 좋을 수 있고, 반대로 과정은 선하나 결과가 나쁠 수도 있다. 일단 마음이 움직이면 행동에 옮기고, 때로는 후회하고 때로는 배우며 전진할 뿐이다.
인생의 참 의미를 책상에 앉아서는 절대 깨우칠 수 없다. 내 판단과 가치관에 따라 사업을 결정하고 이를 헤쳐나가면서 고통과 희열을 겪는 게 인생이다. 그리고 내가 동업을 권하는 이유는 사업 성패를 떠나 우정과 삶의 가치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여 진정한 여행, 사업에 도전하시기를….
▶▶ 김병태 대표는…
1958년 경남 창원에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우성 김종영 선생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서울에 올라와 성균관대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했다. 대학원 시절 국내 최초로 전국도로지도를 만들면서 사업을 시작해 여행사, 출판사, 공유오피스, 빌딩, 비즈니스호텔, 클래식아카데미, 록페스티벌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성공시켰고 공기업인 서울관광마케팅 사장을 거쳐 현재 바이오벤처 소바젠 대표로 있다. 모든 사업을 동업으로 성공시킨 그는 `동업 예찬론자`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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