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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영≪재론 위기와 비판≫ 서평 ② ‘비판의 위기’부터 극복해야." 사회운동은 어떻게 문재인과 다른 길을 갈 것인가"

Bonjour Kwon 2019. 12. 31. 01:25

사회운동은 어떻게 문재인과 다른 길을 갈 것인가

윤소영, ≪위기와 비판≫, ≪재론 위기와 비판≫ 서평 ② ‘비판의 위기’부터 극복해야

김태훈

 

‘오늘의 멍청이는 사기꾼일 따름이다. (今之愚也詐而已矣. 공자, 《논어》)’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핵무장이 안전 보장을 위한 것이라 오인한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은 경제학적 근거가 없는 대안으로서 역사적으로 이미 실패했다. 이러한 이론적 결함은 문재인 정부의 성격을 인민주의로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자유주의에 미달하는 보수주의와 인민주의가 우파와 좌파를 대변하는 한국에서, 문재인 정부의 성격은 오바마의 신자유주의보다 오히려 트럼프의 인민주의에 더 가깝다.

 

윤소영 교수의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은 거침없다. 여기에는 사회운동이 숙고해야 할 쟁점도 상당하다. 최근 약화하고 있으나 참여연대로 대표되는 ‘시민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촛불 정부’에 기대가 컸다. 제대로 된 비판은 없었고, 설령 있더라도 공약했던 개혁을 흔들림 없이 잘하라는 책려였다. 제도권 밖의 ‘좌파’ 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온존하는 부르주아 정권이라는 원론적 비판에 머물렀다. 대부분은 문재인 정권이 한국 사회를 진보적으로 바꾸리라 막연히 기대했다. 이명박근혜 정권보다야 나으니 말이다.

 

이러한 비판의 소멸 혹은 비판의 위기 역시 현 정세의 위기적 측면을 구성한다. 진정한 비판이 필요한 이유다. 《위기와 비판》, 《재론 위기와 비판》은 문재인 정부의 사기극 비판에 이어 그 배경으로서 참여연대(비정부기구)와 386세대로 대표되는 한국 현대 지식인의 결함을 비판한다. 이는 386세대의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역사에 대한 학식이 없는 자가 역사의 주체를 자임하는 것”)

한국의 불행

알튀세르는 엥겔스가 말한 ‘독일의 불행’(deutsche Misere)에 빗대어 ‘프랑스의 불행’(misère française)에 대해 말한 바 있다(《마르크스를 위하여》의 서문 〈오늘〉). 독일은 부르주아 혁명에 실패했지만, 프랑스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토착화에 실패했다는 것이다(“노동자 운동의 진정한 이론적 문화의 부재”).

 

그런데 한국은 부르주아 혁명도 실패했고, 마르크스주의의 토착화도 실패했다. 반면 중국은 부르주아 혁명에는 실패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토착화에는 성공한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청말 서양의 군사기술을 채택해 산업화를 시도하려는 양무운동과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 한 변법운동을 일으켰지만 결국 근대화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신해혁명과 5·4운동으로 이어지며 마르크스주의의 토착화에 성공한다.

 

한국에도 중국의 양무운동과 변법운동에 해당하는 온건적 동도서기파와 급진적 문명개화파가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결정적 차이는 한국의 문명개화파가 결국 개신교를 수용한 데 있다. 개신교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신해혁명 대신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이 나타나고, 5·4운동 대신 신민회의 분화가 나타난다. 독립협회의 후예인 신민회 회원 중에서 윤치호(감리교)와 안창호(장로교)는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을 고수하며 민족해방운동을 등한시했다. 반면 독립을 우선시한 이회영·시영 형제와 이동녕은 무장투쟁을 준비했고, 이동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한인사회당을 건설한다. 이러한 분화에서 알 수 있듯 일제강점기에 개신교가 민족해방운동에 기여한 바는 거의 없었다.

재야의 등장과 인민주의

3·1운동 이후 공산주의가 민족해방운동의 주류로 부상하자 개신교는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친일로 기울었다. 해방 이후 이들은 친일을 친미로 대체하여 이어진다. 해방 이후 친미반공주의의 주류는 평안도에서 탈북한 중·상층 장로교도였다. 보수적 개신교 반공주의는 박정희 정부 이후 장준하와 《사상계》로 상징되는 재야와 분화된다. 재야는 박정희 비판을 위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지만, 반공주의가 더욱 중요했다. 보수적 반공주의와 인민주의적 반공주의가 분화한 것이다.

 

장준하의 박정희 비판을 계기로 동인이 분열되고, 장준하도 정계에 진출하며 《사상계》는 1970년 폐간한다. 1966년 창간한 《창작과 비평》의 재야 사관을 상징한 것은 강만길의 분단 사관이었다. 그 핵심은 해방 또는 개항부터 통일국가까지가 분단시대라는 것이고, 분단시대는 통일운동이 주도한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사가 아니라 정치사·운동사에 치중한 분단사관의 인민주의적 한계는 1980년대 한국 사회 성격 논쟁 과정에서 분명해졌다(《한국의 불행》, 2015).

 

한국 사회 성격 논쟁은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대한 논쟁이자, 변혁의 전망에 대한 논쟁이었다. 민족해방파가 식민지성과 반(半)봉건성에 주목하며 반反제국주의·반反봉건 변혁 전망을 주장한다면, 민중민주파는 해방 이후 사회 성격이 신식민지성 내지 종속성과 독점성으로 성장·전화했고, 변혁의 전망도 반反제국주의·반反독점으로 성장·전화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 부활을 모색한 1980년대는 짧게 끝났다. 1970년대에 이미 시작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계기로 드디어 남한에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운동권의 핵심 세력들이 공개적 전향을 통해 주류화, 즉 지배 엘리트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인식하지 않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식의 트로츠키주의적 알리바이나 침묵, 부정의 태도도 나타난다(《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2006).

경세학의 역사

한국 현대 지식인의 결함, ‘한국의 불행’은 중국과 달리 전현대한국에서 경세사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는 사실로 소급할 수 있다(《봉건제론》, 2013). 이는 중국의 유가 사상이 복고주의적이라 보는 서구적 편견과 달리 유가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과학의 친화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백가쟁명 과정에서 토지제도와 조세제도를 핵심적 대상으로 하는 경세사학이 기원한다. 명·청 시기에 ‘중국의 포이어바흐’ 왕부지는 생활 수준의 상승을 기준으로 역사의 진화를 설명했고, 창업기, 수성기, 중쇠기에 주목하면서 역사의 흥망성쇠를 인식했다. 또한 신권주의의 관점에서 왕권주의·황권주의에 대한 비판도 제시했다. (‘천하는 한 가족의 사유물이 아니다’) 왕부지의 역사이론을 매개로 중국의 유가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로 이행할 수 있었다.

 

전현대 한국에서는 경세학이 발달하지 못했다. 지주전호제에 적합한 조세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율곡 이이의 경세학은 동인(왕권주의 주장)에게선 거부됐고, 서인에게선 상대화됐다. 숙종의 환국 정치, 영·정조의 탕평 정치를 통해 붕당이 소멸했고, 이는 외척의 세도 정치로 귀결됐다. 일조편법·지정은세법과 같은 조세제도에 대한 논쟁은 주변화됐다.

 

한편 서구에서는 계몽주의가 경제학 발전의 토대가 됐다. 헬레니즘 시대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에서 계몽주의의 이론적 역사로 이어지는 계보를 찾을 수 있다.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이란 군주정이 참주정으로 타락하면서 귀족정이 출현하고, 귀족정이 과두정으로 타락하면서 민주정이 출현하며, 민주정이 간민정 또는 난민정(ochlocracy)으로 타락하면서 군주정이 회귀한다는 것이다. 간민 혹은 난민(ochlos)이란 엘리트와 대립하는 대중이라는 의미로 간민정은 결국 인민주의의 정치이다. 폴리비오스는 이러한 정체의 순환을 멈추는 해법으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라는 세 가지 정체의 장점을 결합한 혼합 정체론을 제시했다.

 

번영 속에서 쇠망을 예상한 폴리비오스의 관점은 중세에 잊혔다가 현대에서 볼테르를 거쳐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로 이어진다. 로마제국의 쇠망사에서 역사적 교훈을 찾으려던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주의적 분위기 덕분이다. 폴리비오스는 정체순환론을 ‘증명된’ 역사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계몽주의자들이 생존 양식론을 ‘이론적’(reasoned/conjectural) 역사라고 부른 것과 유사하다. 이론적 역사란 문학적 역사에 대한 대안이면서 동시에 사료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는 역사에 대한 대안이기도 했다. 역사이론으로서 사론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는 역사인 것이다.

 

역사의 과학성을 부정한 데카르트주의를 비판한 볼테르의 뉴튼주의적 역사주의가 ‘이론적 역사’의 발단이다. 프랑스 중농주의를 거쳐 스미스의 고전 경제학으로 계승되었다. 중농주의의 경제법칙관은 스미스를 거쳐 마르크스로 계승되었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경제학 내부에서 맬서스와 리카도-밀의 논쟁이 전개되면서 이론적 역사는 잊힌다. 리카도-밀은 역사를 무시하고 이론에 집착했지만, 그 대안으로 나타난 메콜리의 휘그사관은 역사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이후 마셜의 현대 경제학은 스미스의 이론적 역사를 계승한다. 이렇게 뉴튼과 공자를 수용한 영국의 계몽주의는 경제학으로 귀결된다.

새로운 주류로서 386세대에 대한 비판

지금까지 한국 현대 지식인의 역사를 살펴보고, 아시아와 유럽에서 경세학의 계보를 정리해봤다. 한국은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서 경제학과 자유주의가 취약하다. 그러다보니 반경제학이 아닌 경제학 비판이란 관점에서 자유주의를 지양해야 할 마르크스주의는 더욱 취약하다. 《위기와 비판》, 《재론 위기와 비판》에 나오는 장하성, 김상곤 등 참여연대 출신의 폴리페서들이나 정성진 등 진보 학자들에 대한 비판들은 단순한 ‘디스’라기보다 지식인의 역사(지식의 내용과 지식이 형성되는 맥락으로서 경제와 정치를 포함하는 지식사, intellectual history)에 대한 보론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개인의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주목하지만,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가 그런 제도·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개인의 행동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재론 위기와 비판》의 386세대 비판으로 돌아가 보자.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주가 거품에 비유해보면 ‘공황 직전의 비이성적 열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386세대라는 ‘작전세력’, 다시 말해 바람잡이를 통해 이득을 얻는 세력이 있다. 2002년 대선 경선 당시 노무현 후보 지지자들은 주류교체론을 내세웠다. 노무현이야말로 이인제, 이회창이라는 지역주의, 학벌 중심의 구주류,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자신의 선거 홍보자료에 해당했던 책인 《대한민국이 묻는다(2017)》에서 노론의 세도정치, 친일파 청산 실패, 군부독재와 지역주의로 이어져 온 “우리 정치의 주류세력들을 교체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을 말한다. 이를 위해 “학벌, 학력, 성별, 집안이나 배경, 지역 또는 외모 등에 차별받지 않고, 오직 능력이나 실력으로만 경쟁하고, 실패해도 회복할 수 있는 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작 문재인 정부의 인사청문회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었다. 노무현-문재인 지지자들 또한 지연과 학연을 극복하지 못했다. 서울대를 한양대로, 한양대를 지방대로 대체하고, 경상북도를 경상남도로 대체하는 것이 학연과 지연을 지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고주의를 타파한다는 명분으로 연고를 무시하는 것은 관념적 인간관이다. 오히려 학연이 지연, 지연이 혈연으로 오히려 타락하게 만든다.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인간관계라는 의미에서 우연한 연고인 혈연과 지연은 학연으로 지양해야 한다. 나아가 진리의 추구를 통해 학연을 지양해야 한다.

 

1980년대 이문열·박완서·이병주의 리얼리즘 소설은 386세대의 인민주의적 반지식인주의에 대한 선행된 비판이었다. 이들은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까지의 마르크스주의가 실은 사이비 사상일 따름이라 비판했다. 현 상황에서 해석해보건대 1980년대 386세대의 얼치기 마르크스주의에 경고한 것이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사이비 사상이 횡행하는데, 그 징표는 ‘과거에 대한 반성, 현재에 대한 인식, 미래에 대한 통찰의 결여’다. 사이비 사상은 ‘정신적 유행’일 뿐만 아니라 ‘변형된 출세주의’일 수 있는데, 이들은 사적 불만을 해소하고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도구화했다.

 

비판이라는 말의 어원에는 구분하고 판단한다는 의미가 있다. 오늘날 한국에는 자유한국당과 태극기 부대와 같은 보수세력이 남아있다. 다른 한편에는 문재인 정부가 진보를 참칭한다. 1980년대 한국 사회 성격 논쟁과 같은 변혁전망을 둘러싼 지식인의 논쟁은 자취를 감췄고, 노동자 운동은 보편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지성적 집단으로 전혀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윤소영 교수와 과천연구실의 최근 저작은 길을 찾고 있지 못하는 작금의 사회운동에 깊은 문제의식을 안겨준다. 사회운동은 문재인과 참여연대 출신 폴리페서들의 역사인식과 인민주의적 한계를 계급적·과학적으로 비판하며 분별 정립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또한 경제학 비판이자 역사과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재건과 노동자운동의 사회운동으로 혁신이라는 이중적 과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

필자 소개

김태훈 |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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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다2018/12 제47호

 

역사의 사기극, 연출자는 문재인 정부?

 

윤소영, 《위기와 비판》 《재론 위기와 비판》 서평 ① 문재인정부 정책 비판

김태훈

 

올해 10월, 윤소영 교수는 《재론 위기와 비판》을 출간했다. 《위기와 비판》(2017, 윤소영)의 주장을 다시 거론하겠다는 의미다. 윤소영 교수는 80년대 한국사회성격논쟁에서 PD(민중민주) 이론을 정초한 바 있다. 이후 과천연구실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를 위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두 권의 책에서 위기란 1987년 대통령직선제 개헌 30주년, 1997~1998년 경제위기 20주년, 2007~2009년 금융위기 10주년을 지나 문재인 정부의 집권이라는 현상을 말한다. 비판이란 문재인 정부가 ‘역사의 사기극’을 만들고 있는 ‘사기꾼’이라는 것이고, 386세대로 대표되는 한국 현대 지식인의 결함이 위기를 초래했다는 의미다. 왜 역사의 사기극인가? 청와대와 행정부, 국회의 주류가 되고 있는 386세대를 포함해 한국 지식인의 결함은 무엇인가?

 

역사의 사기극

“헤겔은 어느 부분에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마크르스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헤겔의 경구에 대해 첫 번째는 영웅이 주인공인 비극(tragedy)이고 두 번째는 광대가 주인공인 소극(farce)이라고 강조했다. 현재는 사기꾼이 주인공인 ‘사기극’으로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역사에 대한 학식이 없는 자가 역사의 주체를 자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과거를 서술하여 그 뜻을 밝히면서 미래를 기대한다’는 태도가 사라진 것이다. 역사에 대한 판단(사론)이 역사에 대한 지식(사학)을 대체하면서 근거 없는 판단(격단)이 된다. 중국 문화 혁명기의 영사사학(현재의 정치에 대해 과거의 역사를 빗대어 말한다는 의미)이 결국 현재의 정치에 복무하기 위해 과거의 역사를 날조하는 사이비 과학으로 타락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위기와 비판》, 《재론 위기와 비판》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외교·안보정책, 개헌시도를 분석하면서 사기꾼 행태를 비판한다.

한국 경제의 침몰과 소득주도성장

한국 경제는 1979~1980년과 1997~1998년의 구조적 위기를 두 번 겪으면서도 개혁에 실패했고, 결국 침몰했다.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계승한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타결은 한국 경제를 노동자민족으로 변모시켰다. 한국 경제의 침몰이란 한국 경제가 중진국 함정에 빠졌다는 것, 즉 자본주의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경제를 추격하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다. 이는 수익성과 생산성을 무시하는 한국 자본주의에 고유한 제도인 재벌의 결함에서 비롯된다.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에 의존하는 반도체 호황은 매출액은 인텔을 추월했으나 수익성은 그렇지 않다. 스마트폰 호황은 더욱 심각한데, 삼성전자는 원천기술이 없다.

 

현대 경제학의 경제 성장론은 금융이 세계화된 결과로 발생하는 금리생활자민족과 노동자민족의 차이를 분석했고, 노동자민족의 성장궤도는 국가 부도를 동반한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의 외국인 지분율은 절반에 가깝다. 또 올해 국감 자료에 의하면 시중 6대 은행의 외국인 지분율은 평균 73.3퍼센트고 그 중 SC제일은행과 씨티은행은 100퍼센트 외국인 소유다.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윤소영, 2014); 《현대경제학 비판》(윤소영, 2011))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은 경제학적 사기를 상징한다. 즉 경제학과 경제정책의 역사에 대한 학식이 없는 것이다. 우선 소득주도성장론이 경제학적으로 케인스주의에 근거하는지, 포스트케인스주의의 임금주도성장론에 근거하는지 모호하다. 리카도-마르크스-솔로우의 성장론은 자본축적이 경제성장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임금주도성장론은 노동자 임금의 소비가 경제성장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본축적과 기술진보를 중요시하지 않는 일종의 ‘반(反)경제학’이다. 홍장표 전 경제수석은 ‘임금’주도성장론이라는 말 대신 ‘소득’주도성장론이라는 말을 쓴다. 한국은 자영업자의 비율이 인구 대비 8퍼센트 수준으로 OECD 국가 중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장하성 전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재벌개혁론도 재벌로부터 외국인 투자자를 지키려는 소액주주운동이 아니라 대기업으로부터 국내 자영업자를 보호하려는 공정거래정책에 무게를 두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파견 노동 규제·감독이 자영업자 보호와 갈등을 초래한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재론 위기와 비판》에서 소득주도성장론은 이제 공개적 논란의 대상이 됐고, 삼성에 대한 ‘투자 구걸’은 정부 스스로 그 실패를 자인했다고 평가한다. 7월 문재인 대통령을 인도에서 만나고 8월엔 김동연 경제부총리를 만난 이재용 부회장은 3년간 180조 원의 투자를 약속했다. 김상조가 이재용을 두둔한 것처럼, 《재론 위기와 비판》은 친노·친문이 박근혜의 세습은 악마화하고 적폐로 규정하면서도 유독 김정은과 이재용의 3대 세습에는 관대하다고 꼬집는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은 일본 민주당 실패의 전철을 밟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 민주당은 집권 이후 ‘증세 없는 복지’로 임금분배율을 높였으나, 장기불황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했다.

한반도 정세와 대북정책 비판

문재인 정부는 경제정책보다도 외교·안보 정책에 훨씬 집중했다. 그 핵심은 북한 비핵화인데, 국가안보실장·국가정보원장을 중심으로 북미협상의 중재에 진력해왔다. 2018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핵 무력을 완성했고, 병진 노선에 따라 경제를 완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북한은 문재인 정부와 적극적으로 교류한다. 이러한 태도 급변의 배경에는 경제위기가 있다. 한국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2017년 국내총생산은 3.5퍼센트 감소했고, 올해는 5.0퍼센트 하락하리라 예상된다.

 

문제는 비핵화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복구 불가능한 핵 폐기(CVID)’에 북한은 동의하지 않는다. 북한의 비핵화는 핵무장을 전제한 핵 동결, 기껏해야 핵 군축을 의미한다. CVID에 미달한다는 근거로 이란과의 핵협정을 폐기한 트럼프가 존 볼턴이 주장하는 리비아식 해법을 기각하고 북미정상회담을 추진했다. 트럼프가 김정은 위원장의 입장을 수용한 것인데, 이런 변덕은 올해 치러진 중간선거, 차기 대선에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운전자’를 자임하지만, 사실상 대리운전에 불과하다. 최근 문재인 정부가 경제 제제 완화를 위한 행보를 취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자산총액 286조엔 수준의 세계 6위, 일본 최대의 미쓰비시 은행에 대해 세컨더리 보이콧을 검토하면서 경고를 보내고 있다. 트럼프나 김정은이 문재인에게 운전을 양보할 리가 없다. 게다가 미국 의회가 트럼프를 견제하고 있다. 공화·민주 양당이 ‘대북정책감독법’을 공동으로 발의한 상태인데, 비핵화 협상을 매월 의회에 보고할 것을 의무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윤소영 교수는 《역사학 비판》에서 수령론을 핵심으로 하는 김일성주의는 극단화된 스탈린주의, ‘신화화된’ 개인숭배라고 비판한 바 있다. 여기에 국민대 란코프 교수의 분석을 보충한다. 북한 인구 2500만 명 중 4~8퍼센트 정도인 100~200만 명을 북한의 지배층이라 볼 수 있는데, 이들의 세계관은 ‘극단적 현실주의’다. 체제경쟁은 포기하고 체제생존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경제성장과 정치이념의 우위를 다퉜던 냉전기의 체제경쟁에서 패배했음을 자인하고 탈냉전의 상황에서 체제생존, 나아가 자신의 생존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리비아식 해법을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단지 비핵화 시간표의 문제가 아니다. 2011년 리비아 내전 중에 카다피와 그 가족이 살해된 것은 결국 핵무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유럽은 핵 보복을 걱정하지 않고 반체제운동을 지원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체제보장을 위해 평화협정으로 충분치 않고 핵무기라는 군사적 수단이 필요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대변하는 문정인 교수처럼 핵무장이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부당전제일 따름이다.

 

인민주의의 부활

문재인 정부의 경제학적 사기인 소득주도성장론과 북한의 3대 세습과 핵무장을 용인하는 친북 노선에 대한 비판은 제왕적 대통령과 인민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진보적 요구를 인기영합적 인민주의(populism, 포퓰리즘)와 동일시하는 보수언론의 통속적 비난과 달리, 과천연구실은 현대 정치 이념인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와 구분되는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인민주의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해왔다. 《인민주의 비판》(정인경·박정미 외, 2005, 《한국의 불행: 한국현대지식인의 역사》(윤소영, 2015)

 

이번 저작들에서는 전 세계적 인민주의의 부활이라는 정세를 분석한다. 가장 대표적이고 충격적인 사례가 신자유주의 근거지인 미국에서 나타난 트럼프 당선과 영국에서 나타난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이다. 신자유주의자 오바마가 <만델라 탄생 100주년 기념강연> 연설에서 인민주의를 비판한 것을 참고할 수 있다. 오바마는 전후 세계질서의 형성에서 미국이 제시한 세계표준의 역할에 주목한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함과 모순’, 특히 ‘경제적 불평등의 폭발’ 때문에 중국 시진핑과 러시아 푸틴의 권위주의와 같은 ‘반동’이 출현했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처음에는 왼쪽에서 제기되었던 세계화에 대한 도전이, 그 뒤에는 오른쪽에서 인민주의 운동으로 더 강력하게 나타났다. 오바마는 ‘스트롱맨의 정치(Strongman politics)’라는 표현을 통해 프로토파시즘(파시즘 형성의 기반이 되거나 영향을 주는 문화 운동이나 이념)으로서 인민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타협과 협상으로써 자유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야기를 지어내는(날조하는)’ 풍조임을 지적한다.

 

오바마는 현 정세를 ‘인류의 미래에 대한 두 개의 아주 다른 전망이 세계시민의 감정과 이성을 두고 경쟁하는 순간’으로 분석한다. 즉 신자유주의의 결함과 모순을 해결해 자유주의를 재건함으로써 인민주의 내지 권위주의가 파시즘 내지 군국주의로 악화하는 것을 예방하자는 것이다. 오바마의 ‘포용적 자본주의(inclusive capitalism)’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과 유사해 보이지만, 경제학을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과는 다르다.

제왕적 대통령과 인민주의

비록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구상은 국회의 반대로 실패했으나, 문재인 정부의 4년 중임제 개헌 추진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악하려는 구상이었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상징하는 게 바로 대통령 인사권이다. 대통령은 3천 명의 장·차관, 기관장을 직접 임명하고,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책은 3만 개에 이른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이 직책의 수가 1만 개에서 3만 개로 증가했다.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를 비교하며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분석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선거 정치는 양립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하자) 군주권이 취약한 서양에서 군주의 선거가 선거제도의 기원이다. 반면 아테네 민주정에서는 시민의 동질성을 전제로 추첨제도를 통해 관리를 선발했다. 선거제도는 인민주의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인민주의의 ‘인민’은 엘리트와 대립하는 대중이라는 의미다. 민주주의가 타락한 형태가 바로 인민주의다. 타락하는 원인은 바로 대중선동가의 대중선동이다. 그래서 인민주의를 ‘대중선동가의 지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19세기 영국에서 현대적 선거제도가 출현했고, 영국의 선거정치가 채택한 의원내각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표본이다. 미국의 경우 연방제라는 배경이 대통령제를 채택하게 했으나,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론에 따라 ‘견제와 균형’의 장치들이 도입된다.

 

세계적으로 대통령제를 채택한 국가들이 많은데 그것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의 권위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제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의원내각제를 선호한 김성수의 한국민주당과 대립했던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식물국회’, ‘기생정당’이라는 표현처럼 대통령제에서는 유능한 정치인이 성장할 수 없다. 제왕적 대통령을 용인하는 한국의 정치제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미달하고, 권위주의적 인민주의에 취약하다. 그리고 그 귀결이 현재의 문재인 정부다. 노무현 정부 이래 386 세대는 ‘주류교체론’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군사독재의 보수주의를 재야의 인민주의로 대체하겠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문민화의 실패를 상징한다. 정치이념을 좌·우파로 구분하는 것은 자유주의가 취약한 유럽의 관행인데, 한국에서는 자유주의에 미달하는 보수주의와 인민주의가 우파와 좌파를 대변하는 실정이다.

 

다음 글에서는 남한에서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왜 취약한 지를 한국 지식인의 역사를 통해 살펴보겠다. 그리고 《위기와 비판》, 《재론 위기와 비판》이 사회운동에 주는 함의를 정리해보려 한다.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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