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칼럼.논설.

밀이 '재인산성' 찬성했을까, 자유론 들고나온 유시민의 착각.지도자의 성역화, 지지자의 폭도화둘의 결합 속에 거수기가 된 의원들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안들민주당은 자유주의 정당..

Bonjour Kwon 2020. 11. 18. 06:07
2020.11.18.

[진중권의 퍼스펙티브]

민주당은 자유주의 정당이 아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유시민씨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손에 들고 유튜브 방송으로 복귀했단다. 소식을 듣고 뿜었다. 그가 몰고 다니는 ‘대깨문’이야말로 자유주의의 적들이 아닌가. 이견을 낸 의원을 핍박하고, 바른말 하는 기자들 조리돌림하고, 견해가 다른 동료시민들 ‘양념’ 범벅을 만드는 오소리떼의 우두머리가 자유주의의 바이블을 “사랑한다”니, 이 무슨 변괴란 말인가.

그가 생략한 자유론의 핵심

‘자유론’에는 배경이 있다. 유럽에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군주의 폭정에 대한 우려는 사라졌다. 민주주의는 자기가 자기를 통치하는 제도. 시민들이 자신에게 폭정을 할 리는 없잖은가. 하지만 그런 민주주의에도 폭정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다수에 의한 소수의 억압. 이 새로운 폭정에 맞서 밀은 양심·표현·결사의 자유를 외치며 개인을 “주권자”로 선언한다.

민주주의가 다수의 폭정으로 흐르지 않도록 개인과 소수를 존중하라. 이것이 유시민씨가 빼놓은 ‘자유론’의 배경과 핵심이다. 밀이라면 아마 의회 절대다수라고 상임위를 싹쓸이한 민주당의 행위를 비난했을 게다. 여론을 등에 업고 밤중에 신천지 본부에 쳐들어가거나 그 교주를 살인죄로 고발한 지자체장들의 포퓰리즘은 혐오했을 게다.

“온 인류가 같은 견해이고 한 명만 반대 의견을 가졌다 해서 인류가 그 한 명을 침묵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가졌다 해서 인류를 침묵시키는 게 옳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밀의 자유주의 원칙이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에서는 이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 그것도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의 손에.

친일파 파묘법, 역사왜곡처벌법, 징벌적 손해배상제, 박형순 금지법 등 집권여당에서는 일련의 반(反)자유주의적 입법으로 공론을 제약하고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며 권력분립을 훼손하고 있다. 당·정·청이 다수결 독재의 한길로 치닫는 상황에서 정권의 스피커 노릇 하는 이가 하필 ‘자유론’을 들고나왔다. 어찌 된 일일까?

자유론을 제약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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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최종윤
의문은 곧 풀렸다. “자유론상 어떤 사람의 행동이 타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지점에서는 개입이 정당하다. 집회 방치는 타인의 자유와 복리를 부당하게 침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뜻이다.” 즉 광화문 차벽이 밀의 자유주의 사상에 부합한 조치였다는 얘기다.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유론’을 ‘제약론’으로 써먹은 셈이다.

그가 원용한 것은 이른바 ‘위해의 원칙’(harm principle). “사회 성원의 의지에 반해 행사되는 권력은 오직 그 목적이 타인에 해를 끼치는 것을 막는 것일 때에만 정당하다.” 이 원칙이 정말 차벽의 설치를 정당화해 주는가? 그럴 리 없다. 유시민씨의 독해는 성경에서 맘에 드는 문장을 뽑아 제멋대로 해석해 써먹는 사이비 교주의 그것에 가깝다.

그는 위해의 원칙에서 재인산성의 정당성을 끌어내나 정작 밀은 이렇게 말한다. “위해나 위해의 개연성이 사회의 개입을 정당화한다고 해서 그게 언제나 그런 개입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즉 위해의 원칙은 제한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얘기. 유시민씨가 필요한 절반만 인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그냥 씹어 드신 것이다.

밀은 ‘위해’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 관심이 개인의 권리를 제약하는 데가 아니라 최대한 보장하는 데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위해의 원칙에서 재인산성과 같은 구체적 조치의 정당성을 도출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자 전도된 해석이다. 자유주의의 화신이 설마 그저 위해의 가능성만으로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데에 동의하겠는가.

다수의 폭정

밀의 사상에 부합하는 것은 집회를 허용한 우리 법원의 결정이다. “집회 자체의 개최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감염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필요 최소범위 내에서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려워 위법하다고 볼 소지가 작지 않다.” 즉, 금지조치가 기본권 제약에 요구되는 충분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게 자유주의다.

그런데 민주당의 의원들이 이를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판사의 이름을 딴 금지법을 만들더니, 심지어 국무총리와 법무장관까지 이 광란에 가세했다. 이들의 마인드가 자유주의에서 얼마나 동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집회가 열렸다. 독일의 법원 역시 이를 허용했지만, 거기에 시비를 거는 이들은 없었다.

저들이 저렇게 무리를 하는 것은 다수의 여론 때문일 게다. 당시 국민의 70%가 광화문 집회에 반대했다. 집회를 허용한 판사의 해임 청원에는 무려 20만이 참가했다. 광장에 차벽을 두르는 극단적 조치도 이 압도적인 여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정부에서 다수의 여론을 근거로 소수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밀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정부가 국민과 완전히 하나가 돼 국민의 동의를 받아서만 강제권을 행사한다고 하자. 하지만 스스로든, 정부를 통해서든 국민에게 그런 강제권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최악의 정부만이 아니라 최선의 정부도 그럴 권리는 없다. 여론을 업은 강제 역시 여론에 반하는 강제 못지않게 나쁘다. 혹은 그 이상으로 나쁘다.” 자유주의는 이런 것이다.

공리보다 더 큰 가치

유시민은 자유론을 “사랑”한단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불행한 짝사랑이다. 그는 밀을 벤담으로 착각했다. 재인산성을 정당화하려 했다면 밀이 아니라 차라리 공리주의자 벤담을 원용했어야 한다. 벤담이라면 ‘집회를 금지당한 소수의 손실보다 코로나 방지에서 오는 다수의 이익이 더 크다’며 정부의 손을 들어줬을 테니까.

실제로 봉쇄조치를 정당화하는 데에 민주당 사람들은 공리주의 논변을 사용했다. “집회로 인해 국가적으로 엄청난 세금이 낭비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천문학적 비용이 수반되는 결과를 초래했다.”(정세균) 유시민도 다르지 않다. 밀이 ‘자유론’을 쓴 것은 공리의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는 벤담의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였다.

밀에게는 공리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인격과 인류 번영이 그것이다. 이렇게 공리를 넘어선 도덕적 이상을 주장하는 것은 “벤담의 원칙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마이클 샌델) 인격과 인류의 번영을 위해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바로 사상·표현·결사의 자유다. 밀은 공리의 이름으로 이들 가치를 제한하는 것이 사회에 이익보다 해를 끼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보자. 추미애 장관은 ‘휴대폰 비밀번호 강제해제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당장은 수사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허용되면 오용은 시간 문제. 고작 ‘강요미수’ 사건 때문에 휴대폰을 까야 한다면, 그보다 중요한 사건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언젠가는 온 국민이 국가의 요구에 알몸을 보여줄 처지가 될 게다.

탁월한 어용지식인

나라가 벤담이 말한 파놉티콘으로 변해갈 모양이다. 이 원형 감옥에서 간수는 모든 죄수를 감시하나, 죄수들은 간수를 볼 수가 없다. 지금 권력은 검찰과 감사원을 두드려대고 있다. 자신들은 들여다보지 말라는 얘기다. 어둠 속에 웅크린 두 눈으로 국민의 삶은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시선은 권력이다. 이 시선의 일방성은 민주주의의 부정이다.

테러 방지보다 개인의 ‘자유’를 앞세웠던 그들이 고작 한 사람을 잡으려고 비밀번호를 강제해제하려 한다. 그때 했던 필리버스터도 가짜, 한갓 전술이었던 게다. 지도자의 성역화, 지지자들의 폭도화, 둘의 결합 속에 거수기로 변한 의원들,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안들, 선동과 세뇌와 공작정치. 민주당은 자유주의 정당이 아니다.

유시민씨가 이를 반성하려고 ‘자유론’을 들고나온 것은 아니리라. 상한 고기 위에 칠하는 선홍색 물감이랄까? 변질된 정체성을 가리고 민주당에 자유주의의 외양을 덧씌우고 싶었을 게다. 거짓말로 지지자들을 선동해 방송사 법조팀을 날려버린 그이지만, 고양이라 생각한 개처럼 그에게는 자신이 여전히 자유주의자라는 착각이 필요한 모양이다.

유시민씨는 ‘어용지식인’을 자처한다. 실제로 그는 ‘어용’에 필요한 모든 재능을 타고났다. 도덕의 당파성, 지식의 피상성, 언변의 궤변성. 밀을 재인산성의 옹호자로 둔갑시키는 솜씨라면, 히틀러나 스탈린을 위대한 자유주의 사상가로 바꿔놓고도 남을 게다. 과연 탁월한 ‘어용지식인’이다. 보았는가. 어용질, 이렇게 하는 거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