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덕 칼럼] 보이지 않는 손의 복수
손현덕 기자
입력 2020.12.03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의 이기심 운운하면서 탄생시킨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란 개념은 다름 아닌 가격(Price)이다. 스미스가 경제학의 아버지로 대접받는 이유는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힘이 가격임을 밝힌 데 있다.
푸줏간 주인이 파는 고기나 양조장 주인이 빚은 술 가격이 생산비에 의해 결정되는지, 고기나 술을 사려는 소비자들 주머니 사정에 의해 결정되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건 앨프리드 마셜의 말마따나 "가위의 윗날이 종이를 자르는지, 아랫날이 종이를 자르는지를 따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굳이 경제학을 배우지 않아도 정답을 안다. 수요와 공급이다.
애덤 스미스 이후 경제학은 사실 그 본질을 따지고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손'의 왜곡이 일어날 때 생기는 부작용에 대한 연구다. 최근 논란이 되는 집값·전월세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가격의 왜곡 여부다. 무엇이 왜곡이냐에 대한 경제학적 정의(定義)는 명쾌하다. 그건 '미친 전셋값'이니, '착한 집값'이니 하는 감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게 아니다.
시장의 효율성을 저해하느냐 여부에 달렸다. 경제학 교과서를 인용하자면 시장의 효율성은 소비자 후생과 생산자 잉여에 의해 좌우된다. 즉, 전월세란 상품의 경우는 세 들겠다는 사람이 최대한 지불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가격과 실제로 지불하는 가격의 차이인 소비자 후생을 훼손하는지, 전월세를 놓는 사람이 실제로 받은 금액에서 비용을 빼고 얻는 이득인 생산자 잉여가 훼손되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소비자가 생산자보다 더 혜택을 본다고 반드시 좋은 건 아니다. 부동산 시장에 대한 여론은 그걸 약자의 편에 선다고 해서 정의(正義)라고들 한다. 설사 정의라 해도 그건 단기에만 해당된다. 장기적으로는 이기심의 실종으로 공급 위축을 부른다. 그 결과 소비자 후생의 손상은 필연이다. 그렇다면 불의(不義)다. 지금 부동산 시장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경제학원론식으로 풀어 쓰면 이렇게 된다.
가격이 마음에 안 든다면, 즉 왜곡이라고 주장하려면 소비자 후생과 생산자 잉여의 과학적 측정이 전제돼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현재 형성되는 가격에 죄를 물을 수는 없다.
'미친 집값'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누구나 거주할 집은 있어야 한다. 자가든 전월세든. 주택보급률 100% 같은 통계는 의미가 없다. 그런 논리를 대려면 더 나은 집을 구하기 위해 2600만명이 주택청약예금에 가입한 걸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살고 싶은 지역, 선호 주택이 있다. 단순 무식하게 말하자면 강남 아파트를 원한다. 왜 한적하고 공기 좋은 전원주택에 살지 굳이 복잡한 강남에 살려고 하느냐고 채근한다면 돌아오는 답은 뻔하다. "너나 거기 살아라. 시골에." 강남 아줌마식 표현으로는 "부동산은 새 소리 들리는 데가 아니라 차 소리 들리는 데 사는 거야"라고.
그러나 참 고약하게도 이런 데 정치가 개입한다. 전셋값 폭등 원인과 전쟁을 벌이는 게 아니라 전셋값 그 자체와 전쟁을 벌인다. 주택을 많이 보유하는 건 투기이며 전셋값은 무조건 낮추는 게 정의라 생각하는 우군이 많다.
정치가 완력을 행사한다면, 그것도 고상한 명분을 걸면 시녀인 경제는 당할 재간이 없다. 전월세 상승 폭에 상한을 두거나 계약갱신요구권을 보장하는 것. 그게 가격과의 전쟁, 시장과의 싸움이다.
그러나 만고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다. 경제는 시차를 두고 복수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의 보이는 복수다. 전세난민 신세가 된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급기야 위로금을 주고 세입자를 내보내게 된 것. 전세 집주인이 본인이 이제 그 집에 살겠다고 세입자를 겁박해 이면계약서를 쓰고 전세금을 더 받는 것. 그런 게 시장의 부작용이며 전쟁을 걸어온 상대방에 대한 복수다. 더더욱 아파트는 빵처럼 밤새운다고 만들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그래서 복수는 치명적이다. 참으로 우리의 정치는 때늦은 후회를 많이도 했다. 그러면서도 여태까지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사인 것 같지만.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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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눌러 집값 잡겠다는 도그마
입력 2020.12.03 00:07
대출포함 금융행위 어렵게해
주택 매입 막는 현부동산정책
중세때 종교적 도그마와 비슷
실패원인 교정이 해결의 단초
최근 당국이 연봉 8000만원 이상 소득자가 신용대출을 1억원 이상 받으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적용해 대출 금액을 제한하고, 1억원 이상 신용대출을 받고 1년 이내에 규제지역 주택을 매입하면 대출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미 담보대출 규제를 강화해 사실상 주택 관련 대출을 제한했는데 그나마 있던 신용대출도 막은 것이다. 부동산정책이 실패하며 주택 가격이 폭등하자 이를 강력한 대출 규제로 제어했는데 정책이 선을 넘고 있다.
문제는 부모에게서 재산을 물려받는 일부 계층을 제외한 대부분 젊은 계층의 주택 매입 자체를 봉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택 매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빚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젊은 층은 심지어 소득이 높은 경우에도 대출 없이 주택을 매입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현재 정책은 이들에게 주택 매입 금지에 가깝다.
물론 과도한 빚을 규제하는 조치는 금융 안정에 필요하다.
그래서 원리금 상환 능력이 없는데 빚을 일으키거나 담보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대출을 하지 못하게 한다. 원리금 상환액이 소득의 일정 비율을 넘지 않게 하는 총부채상환비율(DTI)이나 주택 가격의 일정 비율로 대출금을 제한하는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최근 정책은 소득에 기초한 상환 능력이나 주택 가격 대비 부채액과 상관없이 주택 매입에 있어서 대출 등 일반 금융 행위 자체를 사실상 차단하는 것에 가깝다. 마치 중세 시절 종교적 도그마에 따라 이자 수취 같은 금융 행위를 금지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부작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첫째, 일시적으로 주택 매매 가격 상승은 제어할지 몰라도 전월세 가격을 폭등시킨다. 소득과 능력이 되는 사람을 매매 수요로 전환시켜야 전월세 시장의 수요 압력을 덜 수 있는데, 현재처럼 이들의 수요 이동 자체를 제한하면 전월세 가격은 강력한 상승 압력을 받는다. 특히 어느 정도 소득이 있는 젊은 계층이 선호하는 주거지를 중심으로 전세가는 급등할 수밖에 없다.
둘째, 젊은 계층의 주택 매입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재산 형성 기회의 박탈에 가깝다. 과도하지만 않다면 담보대출을 일으켜 주택을 매입하고 대출을 갚는 과정은 소득이 있는 기간에 재산을 쌓아 나가며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대출 자체가 마치 투기인 것처럼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주택처럼 장기간에 소비가 이뤄지는 내구재를 일시에 현금을 준비할 수 있는 계층만 소유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고단한 세입자로 지내라고 하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가혹하다. 물론 사정에 따라 대출을 통한 주택 소유보다 전월세를 선호할 수 있지만, 이는 삶의 방식에 따라 선택할 문제이지 국가가 강제할 사안은 아니다. 이자는 나쁜 것이라며 대출을 통한 투자를 제한하면 실제는 재산을 상속받은 계층이 아닌 사람, 특히 자신의 근로소득으로 재산을 만들어야 하는 이들이 훨씬 불리한 조건에 놓인다.
셋째, 소득이 있는 사람에 대해 비교적 조건이 양호한 금융기관 대출이 중단되면 이들은 제2 금융권, 더 나아가서는 사금융 등 위험한 대출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득이 있고 위험하지 않은 이들까지 이런 대출로 몰리면 저소득 취약 계층은 훨씬 더 위험한 자금에 의존하는 연쇄 효과가 발생한다. 중세 시절 명목상 이자를 금지한다고 실제 대출 행위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불법 채무의 대가로 높은 위험 프리미엄까지 포함된 고리대(高利貸)에 일반 대중은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정책의 실패는 반금융정책의 강화가 아니라 그 실패의 원인을 교정하는 것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대출 자체를 사실상 봉쇄해 주택 매입 자체를 원천 금지하는 현재 정책이 계속된다면 젊은이와 취약 계층이 피해를 입고 경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충격에 노출될 수 있다.
손현덕 기자
입력 2020.12.03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의 이기심 운운하면서 탄생시킨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란 개념은 다름 아닌 가격(Price)이다. 스미스가 경제학의 아버지로 대접받는 이유는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힘이 가격임을 밝힌 데 있다.
푸줏간 주인이 파는 고기나 양조장 주인이 빚은 술 가격이 생산비에 의해 결정되는지, 고기나 술을 사려는 소비자들 주머니 사정에 의해 결정되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건 앨프리드 마셜의 말마따나 "가위의 윗날이 종이를 자르는지, 아랫날이 종이를 자르는지를 따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굳이 경제학을 배우지 않아도 정답을 안다. 수요와 공급이다.
애덤 스미스 이후 경제학은 사실 그 본질을 따지고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손'의 왜곡이 일어날 때 생기는 부작용에 대한 연구다. 최근 논란이 되는 집값·전월세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가격의 왜곡 여부다. 무엇이 왜곡이냐에 대한 경제학적 정의(定義)는 명쾌하다. 그건 '미친 전셋값'이니, '착한 집값'이니 하는 감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게 아니다.
시장의 효율성을 저해하느냐 여부에 달렸다. 경제학 교과서를 인용하자면 시장의 효율성은 소비자 후생과 생산자 잉여에 의해 좌우된다. 즉, 전월세란 상품의 경우는 세 들겠다는 사람이 최대한 지불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가격과 실제로 지불하는 가격의 차이인 소비자 후생을 훼손하는지, 전월세를 놓는 사람이 실제로 받은 금액에서 비용을 빼고 얻는 이득인 생산자 잉여가 훼손되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소비자가 생산자보다 더 혜택을 본다고 반드시 좋은 건 아니다. 부동산 시장에 대한 여론은 그걸 약자의 편에 선다고 해서 정의(正義)라고들 한다. 설사 정의라 해도 그건 단기에만 해당된다. 장기적으로는 이기심의 실종으로 공급 위축을 부른다. 그 결과 소비자 후생의 손상은 필연이다. 그렇다면 불의(不義)다. 지금 부동산 시장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경제학원론식으로 풀어 쓰면 이렇게 된다.
가격이 마음에 안 든다면, 즉 왜곡이라고 주장하려면 소비자 후생과 생산자 잉여의 과학적 측정이 전제돼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현재 형성되는 가격에 죄를 물을 수는 없다.
'미친 집값'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누구나 거주할 집은 있어야 한다. 자가든 전월세든. 주택보급률 100% 같은 통계는 의미가 없다. 그런 논리를 대려면 더 나은 집을 구하기 위해 2600만명이 주택청약예금에 가입한 걸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살고 싶은 지역, 선호 주택이 있다. 단순 무식하게 말하자면 강남 아파트를 원한다. 왜 한적하고 공기 좋은 전원주택에 살지 굳이 복잡한 강남에 살려고 하느냐고 채근한다면 돌아오는 답은 뻔하다. "너나 거기 살아라. 시골에." 강남 아줌마식 표현으로는 "부동산은 새 소리 들리는 데가 아니라 차 소리 들리는 데 사는 거야"라고.
그러나 참 고약하게도 이런 데 정치가 개입한다. 전셋값 폭등 원인과 전쟁을 벌이는 게 아니라 전셋값 그 자체와 전쟁을 벌인다. 주택을 많이 보유하는 건 투기이며 전셋값은 무조건 낮추는 게 정의라 생각하는 우군이 많다.
정치가 완력을 행사한다면, 그것도 고상한 명분을 걸면 시녀인 경제는 당할 재간이 없다. 전월세 상승 폭에 상한을 두거나 계약갱신요구권을 보장하는 것. 그게 가격과의 전쟁, 시장과의 싸움이다.
그러나 만고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다. 경제는 시차를 두고 복수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의 보이는 복수다. 전세난민 신세가 된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급기야 위로금을 주고 세입자를 내보내게 된 것. 전세 집주인이 본인이 이제 그 집에 살겠다고 세입자를 겁박해 이면계약서를 쓰고 전세금을 더 받는 것. 그런 게 시장의 부작용이며 전쟁을 걸어온 상대방에 대한 복수다. 더더욱 아파트는 빵처럼 밤새운다고 만들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그래서 복수는 치명적이다. 참으로 우리의 정치는 때늦은 후회를 많이도 했다. 그러면서도 여태까지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사인 것 같지만.
[손현덕 주필]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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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눌러 집값 잡겠다는 도그마
입력 2020.12.03 00:07
대출포함 금융행위 어렵게해
주택 매입 막는 현부동산정책
중세때 종교적 도그마와 비슷
실패원인 교정이 해결의 단초
최근 당국이 연봉 8000만원 이상 소득자가 신용대출을 1억원 이상 받으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적용해 대출 금액을 제한하고, 1억원 이상 신용대출을 받고 1년 이내에 규제지역 주택을 매입하면 대출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미 담보대출 규제를 강화해 사실상 주택 관련 대출을 제한했는데 그나마 있던 신용대출도 막은 것이다. 부동산정책이 실패하며 주택 가격이 폭등하자 이를 강력한 대출 규제로 제어했는데 정책이 선을 넘고 있다.
문제는 부모에게서 재산을 물려받는 일부 계층을 제외한 대부분 젊은 계층의 주택 매입 자체를 봉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택 매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빚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젊은 층은 심지어 소득이 높은 경우에도 대출 없이 주택을 매입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현재 정책은 이들에게 주택 매입 금지에 가깝다.
물론 과도한 빚을 규제하는 조치는 금융 안정에 필요하다.
그래서 원리금 상환 능력이 없는데 빚을 일으키거나 담보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대출을 하지 못하게 한다. 원리금 상환액이 소득의 일정 비율을 넘지 않게 하는 총부채상환비율(DTI)이나 주택 가격의 일정 비율로 대출금을 제한하는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최근 정책은 소득에 기초한 상환 능력이나 주택 가격 대비 부채액과 상관없이 주택 매입에 있어서 대출 등 일반 금융 행위 자체를 사실상 차단하는 것에 가깝다. 마치 중세 시절 종교적 도그마에 따라 이자 수취 같은 금융 행위를 금지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부작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첫째, 일시적으로 주택 매매 가격 상승은 제어할지 몰라도 전월세 가격을 폭등시킨다. 소득과 능력이 되는 사람을 매매 수요로 전환시켜야 전월세 시장의 수요 압력을 덜 수 있는데, 현재처럼 이들의 수요 이동 자체를 제한하면 전월세 가격은 강력한 상승 압력을 받는다. 특히 어느 정도 소득이 있는 젊은 계층이 선호하는 주거지를 중심으로 전세가는 급등할 수밖에 없다.
둘째, 젊은 계층의 주택 매입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재산 형성 기회의 박탈에 가깝다. 과도하지만 않다면 담보대출을 일으켜 주택을 매입하고 대출을 갚는 과정은 소득이 있는 기간에 재산을 쌓아 나가며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대출 자체가 마치 투기인 것처럼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주택처럼 장기간에 소비가 이뤄지는 내구재를 일시에 현금을 준비할 수 있는 계층만 소유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고단한 세입자로 지내라고 하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가혹하다. 물론 사정에 따라 대출을 통한 주택 소유보다 전월세를 선호할 수 있지만, 이는 삶의 방식에 따라 선택할 문제이지 국가가 강제할 사안은 아니다. 이자는 나쁜 것이라며 대출을 통한 투자를 제한하면 실제는 재산을 상속받은 계층이 아닌 사람, 특히 자신의 근로소득으로 재산을 만들어야 하는 이들이 훨씬 불리한 조건에 놓인다.
셋째, 소득이 있는 사람에 대해 비교적 조건이 양호한 금융기관 대출이 중단되면 이들은 제2 금융권, 더 나아가서는 사금융 등 위험한 대출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득이 있고 위험하지 않은 이들까지 이런 대출로 몰리면 저소득 취약 계층은 훨씬 더 위험한 자금에 의존하는 연쇄 효과가 발생한다. 중세 시절 명목상 이자를 금지한다고 실제 대출 행위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불법 채무의 대가로 높은 위험 프리미엄까지 포함된 고리대(高利貸)에 일반 대중은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정책의 실패는 반금융정책의 강화가 아니라 그 실패의 원인을 교정하는 것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대출 자체를 사실상 봉쇄해 주택 매입 자체를 원천 금지하는 현재 정책이 계속된다면 젊은이와 취약 계층이 피해를 입고 경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충격에 노출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