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23
[머니투데이 대학경제 권현수 기자] [저자 한국산기대 고혁진 창업지원단장(경영학과 교수)]
고혁진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창업지원단장이 한국연구재단, 청년기업가정신재단, 산학협동재단의 도움으로 최근 창업경험을 가진 직장인의 성공기를 소개한 저서 '기업인재! 창업경험자를 주목하라-1, 2호'를 발간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고혁진 단장은 이 책을 통해 청년창업의 활성화는 물론 창업실패를 아우르는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병행돼 건강한 창업 분위기 확산을 유도하고자 하는 바램을 담았다. 본지는 앞으로 고 교수가 소개한 에피소드를 연재해 창업을 바라보는 관점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케이엘제이에셋 전병각 이사
“2000년 벤처 바람을 탔지만 그게 아니어도 창업은 했을 것 같다. 조직이 답답했고 나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상사의 지시를 받는 게 견딜 수 없었으니까. 근데 인생 참 마음대로 안되더라. 뭔가 확실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예측불허의 상황이 생겼고 뭔가 어렵겠다고 느낄 때는 해결의 실마리가 나타났다. 창업 시절에는 월급쟁이 같은 CEO의 삶을 살았는데 지금은 CEO 같은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다."
◆회사 NPL 운용 자산을 2배 이상 늘린 능력자
2014년 6월 말 NPL(Non Performing Loan, 부실 채권)1) 운용사인 케이엘제이에셋에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유명 신용정보회사와 진행하던 NPL 채권 매입 및 일부 관련 사업부 인수 협상이 성사됐다는 소식이었다. 이 인수로 케이엘제이에셋의 NPL 자산규모는 단숨에 2배로 늘어났다. 2011년 설립된 4년차 회사가 NPL 자산 1조원을 굴리는 기업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인수협상의 주역은 전병각 이사. 2013년 5월에 입사해 1년만에 만들어낸 성과다. “NPL 관리사는 자기 자금을 많이 쓸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가치가 살아있는 부실 채권을 찾고 투자자를 확보하는 것이 비즈니스의 핵심이었다. 이번 협상의 경우도 인수자금이 50억원이었는데 제가 생각해도 좋은 거래였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계약서를 쓰기도 전에 투자한 분이 7명이나 됐다. 무려 20억원. 그동안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NPL 관리사는 부실채권을 운용하고 처리해서 수익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매우 복잡다단한 업무 능력을 요한다. 채권 매입사를 선정해 다양한 형태의 업무제휴를 진행하고, 회사의 수익창출을 위해 회수 가능성을 분석하고, 법의 테두리안에서 각종 대외 기관의 규제와 권고사항을 지키고, 고객의 불만이 발생하지 않도록 잘 준비하고... 케이엘제이에셋 이광현 부장은 “NPL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법제도에 대한 지식, 실무 경험, 협상력,
판단력, 인맥 등 수많은 노하우와 깊은 내공이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최적의 인력”이라고 극찬한다.
◆낭인생활 5년 끝에 다시 찾은 직장인이라는 이름
자본주의의 중심인 금융 분야에서 이처럼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어떤 커리어패스(career path)를 밟아왔을까, 현재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는 어떤 대형 금융사에 있었을까, 케이엘제이에셋은 어떻게 이런 능력자를 찾아내 어떤 조건으로 스카웃 했을까 궁금해진다.
“2008년부터 이 회사 들어오기 전 5년동안은 낭인 생활을 하며 살았다. 사업에 실패하고 사기 당하고 온갖 시끄러운 일들에 휘말리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다. 다행히 조그만 능력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돈이나 조건에 관계없이 여기저기 도왔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다시 직장을 다닐 기회도 얻게 됐다. 케이엘제이에셋 설립 당시 개인적으로 컨설팅을 했는데 그게 인연이 됐다."
심상치 않은 인생역정이 감지된다. 그의 삶에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걸까.
◆5번이나 똑같은 보고서 올리는 뚝심과 자신감
전병각 이사는 86학번으로 전공(국제경제학과)에 따라 금융권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초봉이 높다는 기업도 연봉 1800만원선이었는데
그가 입사한 한국신용정보는 2100만~2200만원이나 됐다. 증권업체 3곳도 동시 합격했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었으므로 보수가 좋은 쪽을 택했다.
그는 3년 남짓 재직하면서 신용카드 VAN사업 기획업무를 맡아 성과를 잘 내는 직원으로 평가받았다.
1996년 당시 신용카드 VAN사업을 막 시작한 한미은행(현 한국씨티은행)이 그를 눈여겨보고 전격 스카웃했다. 신용카드 결합상품을 개발하는 업무 가 주어졌는데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였다. 각종 카드기획에 발군이었고 신세계 카드사업부를 인수하자는 아이디어를 내 채택이 되면서 눈부신 성과를 낸다. 대리점 카드 거래액이 1조원을 넘었고 팀이 일궈낸 흑자가 120억원에 달했다.
“제안서를 쓰면 통과율이 95% 이상이었다. 기획한 아이디어가 회사에서 받아들여지고 그게 매출성과로 이어지는 정말 신나는 시간들이었죠. 한번은 올린 보고서를 수정해서 다시 올리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다시 올렸다. 세 번, 네 번... 처음에는 뭐 이런 놈이 있어 하다가 다섯 번만에 인정해줬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었고 나를 알아봐 주는 상사를 만난 것(인생 선배이자 멘토였던 그 상사와의 직장 인연은 2006년 한 번 더 이어질 뻔 했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대리에 불과했지만, 호봉제여서 성과급도 없었지만 일하는 재미 하나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벤처 바람 타고 이직...
2001년 IT 창업 그만큼 자신감에 넘쳐있었던 시기였다. 혈기왕성하고 호기심 많고 자신만만한 그가 2000년 불어닥친 벤처바람을 탄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첫 직장 사수였던 선배 제안에 2000년 1월 잘나가던 직장생활을 접고 벤처기업으로 이직한다. TCP-IP를 칩으로 구현하는 아이디어였는데 당시 개발자금 확보를 위해 창업투자사를 백방으로 뛰어다녀 300억원 투자 유치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칩은 개발했는데 팔 곳을 단 한군데도 찾지 못했다. 수익화에 실패한 것이다. 동료 2명과 함께 아예 창업의 길로 나섰다. 그게 2001년이다.
사업은 초기에 순탄했다. 자본금도 SI(시스템 통합) 용역을 통해 벌어들인 5000만원으로 충당했다. 자연스레 SI사업을 했는데 3년동안 1인당 1억원 이상의 매출을 충분히 올렸다. 먹고 살기에 전혀 지장없었다.
“마진도 좋고 괜찮았다. 그런데 IT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직원들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게 별로 재미가 없었다. 3억원을 투자해 화상채팅 솔루션을 개발했는데 6개월동안 단 한군데도 팔지 못했고. 그러다 당시 한미은행에서 50명 규모의 콜센터 비즈니스를 대행할 의향이 있냐는 제안이 와서 받아들였다. 은행 관련 업무는 자신이 있었다. 300~400명까지 콜센터 규모가 늘었고 50억원 매출을 올리면서 무난한 사업가의 길을 걷는가 싶었다.”
◆한방에 날아간 자산 400억원.
지난 2000년 중반부터 시작한 주식투자는 계속 재미를 보고 있었다. 자산이 계속 불어나 그 가치가 400억원에 달했다. 그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
같은 햇살 가득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2008년. 말그대로 풍비박산이 난다. 순식간이었다.
첫 직장 사수였던 선배가 풍력 및 태양광 사업을 벌이고 있던 코스닥 등록사를 인수할 것을 제안하면서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업이 유망할 것 같았고 사람을 믿었기 때문에 고민 끝에 투자를 결정하고 대표이사를 맡았다. 하지만 결과는 직장 사수의 배신과 잠적. 그리고 이어지는 몰락의 도미노. 400억원에 이르는 자산은 한방에 날아갔고 상장은 폐지됐고 피해를 입은 주주들은 책임을 지라고 난리였다. 지옥도가 펼쳐졌다.
본인이 가장 큰 피해자였지만 명의 대표이사를 한 탓에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0년에 상황이 마무리됐다. 100%는 아니지만 60~70%의 피해보상을 했고 법적인 문제도 해결됐다. 수습 과정에서 피해자였다는 걸 알고 도의적인 책임은 묻지 않았다. 하지만 공식적인, 제도적인 책임을 지지 않을 수는 없다. 호된 인생 경험을 한 것이다. 미국으로 도망간 그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번씩 연락은 한다. 미워하면 뭐하겠나, 결국 내 욕심에 내가 무너졌다 이런 생각을 하죠.”
◆나한테 딱 맞는 최적의 직장을 만나다
콜센터 사업체도 2008년 같이 접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지만, 그리고 여러 곳에서 입사 제안이 왔지만 사태 수습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속편하게 회사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사업가, 자산가에서 하루아침에 실업자, 낭인신세로 신분이 바뀌었다.
다행히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개인적인 컨설팅과 기획 제안 등을 통해 얼마간의 생활비는 벌 수 있었다.
그러다 지금의 케이엘제이에셋과 인연이 닿았다. 금융 노하우를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설립 초기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준 게 취업으로 이어졌다. 2013년 5월 입사 당시 13명이었던 직원이 2014년 9월 현재 43명으로 늘 정도로 회사는 성장하고 있다. 부서원도 2명에서 7명으로 늘어났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직장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창업 당시 월급쟁이 같은 CEO로 살았다는 전 이사는 지금은 CEO같은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남들은 감당하기조차 힘든 시련에도 자신을 지키며 살 수있었던 그 힘은 같은 보고서를 다섯 번이나 올릴 수 있는 뚝심과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