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최대 화장품 제조업체 '로레알(L'Oreal)'은 중국 시장 진출 후 2014년까지 18년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로레알에 이어 세계 2위의 고급 화장품 메이커로 자리매김한 '에스티로더(Estee Lauder)'는 지난해 중국에서만 85개 독립 매장을 열었다.
중국 시장이 무섭게 크는 시장이라면 한국과 일본은 세계 뷰티업계를 이끌어 가는 '리딩 마켓(Leading Market)'이다. 글로벌 리서치 기관 칸타월드패널에 따르면 한국 여성 소비자들은 하루에 7~8개 화장품을 사용한다. 전 세계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일본은 노령층의 화장품 소비가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국가다. 2~3년 전부터는 동남아시아 소비자들이 화장품에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서유럽과 미국의 화장품 시장이 정체기에 머물러 있는 점과 비교하면 아시아 시장의 매력은 더 커진다.
전 세계 뷰티 업계에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아시아 시장은 언제까지 불어날까. 4월 23일 서울 여의도동 칸타월드패널코리아 본사에서 만난 마시 코우(Marcy Kou) 칸타월드패널 아시아 최고경영자(CEO)는 "이제 중국보다 동남아 소비자들에게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칸타월드패널은 전 세계 최대의 소비자 패널 기반 리서치 업체로, 60개국에 3500여명의 전문연구원들을 두고 있다. 이들은 주로 소비자들이 어떤 제품을 사는지, 유통 시장 전반에 어떤 변화가 일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조사한다.
닐슨과 칸타월드패널을 포함해 25년간 아시아 화장품 시장을 집중 연구해 온 코우 CEO는 24일 '2015 화장품 마케팅 세미나'에 참석차 방한했다.
-아시아 뷰티 시장의 판도는 어떻게 짜여져 있나?
"전체적인 시장 규모를 놓고 보면 당연히 중국이 가장 크다. 13억명이 화장품을 하나씩만 써도 아시아 나머지 국가들보다 많은 양을 쓴다. 그 다음 일본과 한국, 대만 순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인당 사용량을 보면 한국이 가장 많다. 자체 조사 결과, 한국 여성들은 일인당 하루에 7~8개의 화장품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본 클렌징부터 토너, 모이스처라이징, 주름 개선, 에센스 등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중국 여성들은 아직 3~4종류만 사용한다.
일본은 65~75세 노령층 화장품 사용자들이 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뷰티 시장의 주요 소비자는 30~40대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에선 실버그룹(silver group·고연령층)들이 비싼 럭셔리 화장품들을 자신을 위해 사는 경우가 많다. 유난히 주름 개선, 노화 방지 관련 화장품이 인기있는 편이다. 그동안 가족에게 헌신해 왔던 일본의 고연령층 여성들이 점차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한국과 중국에서도 고등 교육을 받은 고연령층 소비자가 늘어나면, 현재 일본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동남아 시장은 이제 막 커지기 시작했다. 중국, 일본, 한국과 같은 동북아시아는 기본적으로 화장품을 팔기에 적합한 기후다. 기후가 상대적으로 덜 습하고, 추운 날과 더운 날이 반복되기 때문에 다양한 기능성 화장품 시장이 발달했다.
하지만 동남아는 일년 내내 뜨겁고, 습도도 높다. 자연적인 영향으로 화장품을 잘 쓰지 않았다. 중국이 화장품 4개를 사용한다면 동남아에선 화장품을 2단계로 사용한다. 비누로 클렌징을 하고, 로션을 바르는 것이 전부다.
바꿔 말하면 아직 일인당 화장품을 최소 2개 이상, 많게는 6개까지 더 사용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BB크림이나 기능성 화장품에 대한 수요는 날씨와 상관없이 큰 편이다. 앞으로 동남아 지역 화장품 소비량은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중국 등 아시아 지역 경제 성장률이 꺾이면서 아시아 전역에서 뉴노멀(new normal·기존의 고속 성장 대신 중저속 안정 성장) 시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추세가 이어진다면 아시아 소비자들이 이전만큼 화장품에 지갑을 안 열 가능성이 크지 않나?
"화장품 제조업체들은 진출 국가의 경제 상황을 걱정하지만, 실제 조사 결과를 보면 위축될 필요가 없다. 중국이 아시아에서는 가장 큰 화장품 시장이니, 중국을 예를 들어보자. 중국에서 휴지·전구처럼 회전 속도가 빠른 일상소비재(FMCG·Fast Moving Consumer Goods) 시장은 2013년 12% 성장했다.
그러나 2014년 중국 경제 성장률이 6%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기업과 가정들은 '화장품 사용량이 줄어들면 어떡하지'라는 우려가 커졌다. 하지만 화장품 시장은 2014년에도 여전히 12% 성장세를 이어갔다.
화장품은 의외로 경기의 영향을 덜 받는 산업이다. 일상소비재들은 아껴 쓰려면 아껴쓸 수 있다. 그러나 화장품은 경기가 안 좋다고 사용량을 줄이기가 쉽지 않다. 고가품과 그 대용품이 적절하게 나눠져 있어서 정 경제사정이 안 좋아졌다 싶으면 비슷한 기능을 가진 다른 제품을 선택할 수도 있다. 화장품 제조업체 입장에선 전체적인 매출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당장 한국 공항만 가봐도 한국산 화장품을 쓸어 담는 중국인 관광객을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이들은 자국 경제 상황과 상관없이 기능성 화장품, 고가 화장품을 더 선호한다. 개인적으로 그 장면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뉴 노멀은 어찌보면 전 세계 화장품 제조업체에겐 모닝콜(wakeup call)과 같다. 뉴 노멀이라고 말하는 시기가 오히려 경쟁 기업들을 제칠 수 있는 기회다.
칸타월드패널이 중국 화장품 시장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종합하면, 중국 경제성장률은 매년 낮아지고 있지만 화장품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특히 중국 남성 가운데 85%가 그들의 외모에 신경 쓰기 시작한 가운데, 면도 제품·향수를 제외한 남성용 샴푸·구강용품·세정제 등에 대한 선택권은 적은 상태다. 신제품 수요가 크다. 칸타월드패널은 "'미투(Me too)제품', '카피캣(Copy cat)'의 위협이 있지만, 중국 소비자는 분명 혁신적인 신제품을 원하고 있고, 여기에 성장기회가 있다"고 조언한다."
-화장품 업계에서도 후발주자들의 '따라하기(copy and paste)' 전략은 여전하다. 비슷한 제품이 쏟아지는 아시아 시장에서 이런 전략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기술력을 갖춘 기업으로선 이런 상황이 억울할 법도 하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따라하기 전략을 법적인 차원에서 막기란 쉽지 않다. 화장품은 내용물과 배합 방법, 제형에 따른 차이점을 명확히 밝히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25년간 이런 경우를 숱하게 봐왔다. 화장품 업계에선 신제품이 나오면 보통 3개월 만에 유사한 제품을 내놓는다. 6개월이 지나면 거의 똑같은 제품이 나온다. 신제품을 내놓고 1위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는 기간은 길어야 1년 정도다.
앞서가는 업체라면, 이 기간에 오히려 따라하는 기업을 이용해 시장을 넓혀야 한다. BB크림을 예로 들어보자. 다른 기업들이 BB크림과 유사한 상품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세그먼트(영역)의 화장품은 좀처럼 커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는 달팽이(snail) 화장품도 마찬가지다.
신제품을 개발한 업체는 두 가지를 차이점으로 내세워야 한다. 첫번째로 원조(original)가 갖는 프리미엄을 강조해야 한다. 후발주자는 이전 제품보다 싼 가격으로 경쟁하려 한다.
그러나 먼저 개발한 업체는 싼 가격보다 '원조'라는 신뢰도를 마케팅 차원에서 내세울 수 있다. '프리미엄 프라이스 포지션(premium price position)'을 놓치고 같이 가격 경쟁으로 가선 안된다.
두번째로 추가 제품 구성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이미지 측면에서 높은 가격을 고수하는 대신, 다양한 제품군을 선보이거나 기능을 추가하면 소비자들은 원조 기업에 신뢰를 갖는다. 한국에서 미샤가 SK-II와 다른 가격대로 승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중국과 다르게 한국과 일본에선 아모레퍼시픽, 시세이도 같은 자국 기업들이 화장품 시장을 꽉 잡고 있다. 해당 기업들이 자국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그들은 '미(美)의 기준'을 세웠기 때문이다. 사실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는 국가마다 다르다. 가령, 중남미 지역에선 피부색이나 피부결보다 '머리카락이 얼마나 곧게 뻗어있느냐'를 미의 기준으로 삼는다. 실제 중남미 화장품 업체들은 매출의 최대 70%를 헤어 스트레이트 제품에서 올린다. 이런 시장에선 화장품보다 헤어 관련 제품을 만드는 업체가 성공한다.
아모레퍼시픽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고있다. 그리고 연령대에 맞춰 다양한 제품들을 만들어 낸다. 시세이도와 SK-II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구매력있는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개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을 제품화 해서 소비자에게 전달할 오퍼레이션(operation)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을 선도하는 것이다.
기업뿐 아니라 소비자들도 부지런하다. 중국 속담에 '못 생긴 여자는 없다. 게으른 여자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화장품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소비자들이 잘 사용해 주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앞서 말했듯 한국 여성 화장품 소비자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화장품을 매일같이 사용한다. 그러니 화장품 제조업체와 소비자 사이에 시너지 효과가 생긴다.
물론 그러기 위해 품질은 기본이다. 한국과 일본의 화장품 제조 기술은 이미 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많은 외국 화장품 제조 업체들이 아시아 시장에서 성공하길 원하는 만큼 한국 업체들 역시 이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길 바란다. 국내 화장품 업체들이 아시아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모든 제조업체들은 해외로 진출할 때 겸손해져야 한다. 해당 국가 소비자들이 어떤 식으로 돈을 쓰는지, 어떤 생활 방식을 가졌는지 일단 관찰하라는 말이다. 특히 화장품은 소비자가 구매할 때 감정적인 부분이 다른 소비재보다 많이 작용하는 분야다.
예를 들어 중국 일부 고학력 여성 소비자들은 화장품이 화학 약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메이크업 자체를 꺼리는 사람들도 많다.
동남아 시장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저가(低價) 전략을 중심으로 공략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지역 소비자 역시 무조건 싼 제품을 원하지 않는다. '기능은 갖췄지만, 가격은 상대적으로 저렴한(better function, better price)' 제품을 원한다. 말하자면 '스마트 쇼퍼'가 늘어난 셈이다. 동남아에서도 '비싼 만큼 내가 더 예뻐질 것'이란 감정적 소비가 통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값은 비싸지만, 품질이 우수한 한국 화장품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이런 부분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최소한 5년 정도 현지에 사무소를 두고 소비 행태를 지켜봐야 한다. 한국에선 아직 2~3년 안에 성과를 보려는 기업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화장품 시장에 진출하려 한다면 최소 5년을 보고 계획을 짜야한다."
/유진우 기자 oj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