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삼성전자'가 떠나 간 그리스
2015.07.27 03:00
손진석 국제부 기자
삼성전자가 본사를 외국으로 옮기는 걸 상상해본 적 있는가. 그리스는 비슷한 일을 실제로 겪었다. 2012년 아테네 증시에서 시가총액의 22%를 차지하던 최대 상장 기업 코카콜라헬레닉이 본사를 스위스로 옮겼다. 코카콜라 브랜드를 가져와 음료 제조업을 시작한 지 43년 만에 고국을 등졌다. 그리스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89년 역사의 낙농 기업 파예도 이때 룩셈부르크로 본사를 옮겼다. 그리스에 미래를 맡기기가 불안한 기업들이 하나 둘 떠난 것이다.
결과는 어떨까. 작년 파이낸셜타임스(FT)의 글로벌 500대 기업에 그리스 회사는 한 곳도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유럽 500대 기업으로 좁히면 그제야 그리스 회사가 5개 나타난다. 그중 기간 사업체인 은행·통신사 네 곳을 빼면 499위에 턱걸이한 오팝(Opap)이 간판 기업이다. 그런데 이 회사는 복권·스포츠 베팅을 주관하는 공기업이다. 건실한 기업이 떠나거나 성장하지 못한 민 낯이 이렇다.
그리스가 세 번째 구제금융을 받아 소생하게 됐다. 하지만 공장을 돌리지 않고도 거대한 빚더미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그리스는 관광 국가답게 GDP(국내총생산) 중 서비스 비중이 81%에 이른다. 산업 비중은 16%에 그치고, 그중에서도 제조업은 미미하다. 자동차·휴대전화 같은 현대 사회의 필수재를 수입에 의존한다. 수입이 수출의 1.75배에 달할 정도로 무역 구조가 병들었다.
일부 지식인들은 그리스가 긴축을 강요당해 경제 규모가 쪼그라들었다며 피해자인 것처럼 감싼다. 그러나 실상은 오랜 세월 유로화로 치장하고 빚으로 쌓아올린 모래성이 허물어져 제자리를 찾는 과정에 가깝다. 그들은 풍족할 때도 기업 키우는 일을 게을리했다. 한국은 GDP 대비 R&D(연구·개발) 투자가 4.2%인데 그리스는 0.8%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꼴찌 수준이고 1%를 넘긴 적이 없다.
그들이 물려받은 밥줄인 관광업도 한계가 있다. 공산품 수출보다 부(富)를 불리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세상에는 관광 대국(大國)이 수두룩하다. 그리스의 해외 관광객 숫자는 유럽 7위, 세계 16위다.
한국이 그리스와 달리 구제금융 치욕에서 빨리 벗어났던 것이 단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원화 가치가 충격적으로 떨어졌지만 그걸 지렛대 삼아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수출을 급격히 늘릴 수 있었던 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제조업이 버티고 있어 회생으로 가는 출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업이 수출로 얻은 과실을 나눠 국가 경제가 돌아가게 하는 건 사람으로 치면 심장이 피를 순환시켜 온몸을 덥히는 것과 같다. 괜히 제조업을 '자본주의의 꽃'이라 부르는 게 아니다. 똑같이 강풍이 불었지만 그리스는 뿌리가 뽑혀 의지까지 잃은 반면 한국은 대들보가 버텨준 덕분에 재건(再建)이 가능했다. 외환 위기 당시 모진 풍파를 견뎌가며 생산 현장에서 묵묵히 땀을 흘렸던 분들께 새삼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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