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8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이하 금투협) 회장의 뒤를 이을 차기 협회장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27일 현재까지 금투협을 통해 출마를 공식화한 후보자는 총 4명입니다. 황성호 전 우리투자증권 사장과 손복조 토러스투자증권 회장, 권용원 키움증권 사장, 정회동 전 KB투자증권 사장이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후보자 4명 가운데 3명이 자산운용업계를 의식한 듯한 공약을 내걸었다는 점입니다. 황성호·손복조 후보는 “자산운용 회원사들을 별도 협회로 분리하겠다”고 말했고, 정회동 후보는 “자산운용 부문 부회장제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왜 후보자들은 자산운용업계를 위한 ‘맞춤형’ 공약을 앞다퉈 쏟아내는 걸까요. 금투협에는 운용사뿐 아니라 증권사와 선물사, 부동산 신탁사 등도 회원으로 등록돼 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후보자들의 약속은 통합 출범한지 10년도 안된 금투협을 다시 갈라놓겠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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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황성호 전 우리투자증권 사장, 손복조 토러스투자증권 회장, 권용원 키움증권 사장, 정회동 전 KB투자증권 사장 / 조선DB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하 자본시장법)’이 시행된 2009년 2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자본시장법은 증권거래법,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 선물거래법, 신탁업법 등 기존의 자본시장 관련 법률 6개를 통합해 만든 법입니다. 각각의 법에 따라 업계 입장을 대변하는 협회도 증권업협회, 자산운용협회, 선물업협회 등으로 세분화돼 있었죠. 이들 협회는 자본시장법 도입을 계기로 금투협이라는 한 지붕 아래 새 둥지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자산운용업계의 불만이 나오기 시작됩니다. 금융투자라는 큰 울타리 안에 모이긴 했으나 증권사와 한 곳을 바라보며 동일한 목소리를 내기에는 힘에서 밀리고 경쟁해야 할 부분도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증권사가 선보이는 주가연계증권(ELS)과 랩 어카운트(자산관리 계좌)는 자산운용사가 출시하는 공모펀드의 직접적인 경쟁 상품이 됩니다. 그런데 이들 상품 모두 판매 창구는 증권사로 통일돼 있습니다. 투자자가 직접 고를 수 있는 온라인 펀드 장터가 등장하긴 했지만 대중화까지는 갈 길이 먼 상태입니다.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 조선DB
즉 운용사 입장에서 증권사는 절대 심기를 건드리면 안되는 ‘수퍼 갑’인 셈입니다. 펀드를 운영하는 매니저나 포트폴리오 구성이 좋아도 판매사인 증권사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해당 상품이 시장에서 성공할 확률은 크게 낮아지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갑과 을이 공존하는 협회에서 을이 얼마나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겠냐”는 불만이 나온 것입니다. 업계 한 관계자는 “회사 규모부터 상대가 안되고, 그나마 덩치가 큰 운용사는 대부분 다른 증권사와 계열사 관계로 묶여있다”며 “금투협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증권사와 운용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가령 펀드 운용보수가 지나치게 높다는 여론이 형성됐을 때 자산운용업계는 판매사가 받는 판매보수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을 것”이라며 “자산운용협회라면 이런 목소리를 내주겠지만, 증권사 눈치를 봐야하는 지금의 금투협은 절대로 입을 열 수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같은 설움이 지난 10년 가까이 쌓여왔고, 이번 선거에 도전장을 내민 후보들이 자산운용업계 표심을 얻기 위해 비슷한 공약들을 쏟아낸 겁니다. 후보들은 자산운용 회원사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현재 금투협 회원사는 증권사 56개, 자산운용사 169개, 선물사 5개, 부동산 신탁사 11개 등 총 241개사로 구성돼 있습니다. 올해 들어 총 36개사가 늘어났는데, 이중 34개사가 자산운용사(전문사모운용사 포함)입니다.
물론 금투협 분담금 지분의 절반 이상을 대형 증권사들이 담당하고 있는 만큼 협회내 힘의 중심도 여전히 증권사에 있긴 합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번 협회장 선거의 ‘캐스팅보트’를 증권사가 아닌 169개 자산운용사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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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증권가 전경 / 조선DB
이쯤되니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자산운용협회 독립’은 현실 가능한 공약일까요.
현재 금투협은 자본시장법령에서 정한 조직에 관한 사항에 따라 운영되고 있습니다. 자본시장법 284조에는 “협회가 아닌 자는 ‘금융투자협회’, ‘증권협회’, ‘선물협회’, ‘자산운용협회’ 또는 이와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자산운용협회를 독립시키려면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법 개정안 발의는 정부나 국회의원이 할 수 있는데 이 정도 사안으로 법 발의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국회 상임위원회와 본회의 등도 통과해야 합니다. 물론 임의단체 같은 형태로 구성한다면 좀 더 수월할테지만, 회원사들이 임의단체에 속하는 걸 그다지 원할 것 같진 않네요.
차기 협회장 공모 기간은 2018년 1월 4일 오후 6시까지입니다. 네 번째 협회장은 1월 25일로 예정된 회원총회에서 241개 정회원사의 비밀투표로 결정됩니다. 금투협 후보추천위원회는 1월 중 서류·면접 심사 절차를 진행한 다음 복수의 최종 후보자를 선정해 회원총회에 추천할 방침입니다.
어느 후보가 당선의 기쁨을 맛볼지 아직 알 수는 없습니다. 아무쪼록 국내 자본시장 종사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헌신할 수 있는 적임자가 황영기 회장의 바통을 이어받길 기대합니다.
[전준범 기자 bbeom@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