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경제
입력 2018.05.25 06:30
취업난을 맞은 청년들이 ‘노후 보장 자격증’이라 불리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몰리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부동산 호황이 이어진 데다 이른바 ‘건물주’로 불리는 임대소득자가 선망의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공인중개사 취득을 통해 시장 흐름을 파악하고 부동산 자산을 불릴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젊은 세대가 늘고 있는 것이다.
25일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2012년 32.2%였던 30대 이하 공인중개사 응시자는 2016년에 41.8%를 차지하며 사상 처음으로 전체 응시자의 40%를 넘었다. 2년째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준비 중인 이모(28)씨는 “한국에서 부동산은 여전히 불패신화 믿음을 준다”며 “잘만 하면 버는 돈이 적지 않아 일반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 훨씬 낫겠다는 생각에 공인중개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종로의 A공인중개사학원에서 자격 시험을 준비중인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최지희 인턴기자
◇보조원 기본급 50만원 불과, 중개 경쟁도 치열해 “못 버텨”
부동산 중개업자 수는 지난해 10만명을 넘어선데 이어 올해 4월 기준으로 10만4592명을 기록했다. 개업 중개업자 당 주택 중개건수는 지난해 9.3건. 기존 중개업자 간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새로 진입해야 하는 새내기 청년 중개업자들에게는 문이 더 좁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공인중개사 이국봉(25)씨는 “가족이 이 일을 하지 않는 이상 현장 경험이 부족한 젊은 사람들이 자격증을 딴다 하더라도 텃세와 경쟁이 심한 이 바닥에서 바로 창업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보조 중개사로 일을 시작한 허모(29)씨는 “기존 네트워크가 형성된 공인중개사들끼리 매물 정보를 공유해 공동중개를 하는데, 젊은 사람이 갑자기 사무실을 차리고 들어오면 배척할 때가 잦은 걸 많이 목격했다”고 했다.
대부분의 청년은 공인중개사 보조원으로 들어가 현장 경험을 먼저 쌓는다. 하지만 계약을 따내지 못하면 수익이 없는 중개시장에서 경험이 없는 젊은 사람들이 버티기가 쉽지 않다. 철저히 성과에 기반을 두는 구조이다 보니 기본급은 최저 시급(시간당 7530원)에도 못 미친다. 성동구 상왕십리동 휴제이 공인중개 황지욱(53) 대표는 “보통 기본급은 50만원 선부터 시작하고, 성과 비율을 높게 쳐주는 곳은 아예 기본급이 없다”고 말했다.
중개를 성사할 때마다 책정되는 성과의 경우 중개업소와 중개자가 6대 4부터 8대 2까지 나눠 몫을 챙긴다. 매매가 수수료율 법정 한도는 토지와 상가가 0.9% 이하, 6억원 이상 주택 임대계약은 0.8% 이하다. 수수료 요율이 높은 편이지만, 워낙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 토지나 상가, 고가 주택을 중개하는 건 새내기 중개 영업자로선 ‘하늘의 별 따기’다.
전세 보증금이 1억원 조금 넘는 오피스텔은 중개보수 요율이 0.04% 이하라 1실을 계약할 때마다 보통 40만원 남짓의 중개수수료를 받는다. 여기서 다시 일정 비율을 뗀 나머지가 실제 중개를 해준 사람의 몫인데, 그마저도 사무실이 수수료 지급 비율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소송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거래 건수가 없어 기본급만 받다가 발을 돌리는 청년도 적지 않다. 공인중개사 이모(35)씨는 “전단도 돌리고 온라인 홍보 등을 해도 계약을 한 건도 못 따 월 기본급 50만원만 받고 석 달을 버티다 그만둔 친구도 있다”며 “아무리 발로 뛰어도 계약이 없으면 돈을 벌지 못하니 오래 버티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전했다.
◇“불안한 중개업, O2O 종속 심화”
경기 동향과 정책에 따라 부침이 큰 부동산 중개업의 특성상 앞으로 몇 년간 전망도 밝지 않아 보인다. 정부가 부동산 과열을 잡기 위해 금융·거래 규제를 잇달아 쏟아내고 있어서다. 휴제이공인 황지욱(53) 중개사는 “분양권 전매도 묶어놓고 대출규제도 강화돼 거래가 실종됐다”며 “기존 중개업자들도 먹고살기 힘들어졌다”고 했다.
부동산 O2O(온라인과 오프라인 연계 사업) 서비스도 공인중개사들에겐 위협이다. 은평구 구산동 탑디앤씨 김정열(32) 공인중개사는 “직방이나 다방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 같고, 서비스를 이용하자니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부동산 O2O 앱(app) 1위 업체인 직방의 경우 서울 지역(강남·관악 제외) 다세대 원룸 광고 10개를 올릴 수 있는 기본 서비스는 31만원(부가세 제외)부터 시작한다. 여기에 상위 추천 광고를 더하면 2개 단위로 9만원이 추가된다. 물건을 30개 올리려면 월 200만원 이상 내야 한다.
김정열 중개사는 “창업을 해도 최소 5년은 자리를 잡는 데 투자해야 한다”며 “중개사 자격증을 땄다고 노후가 보장될 거란 기대부터 접고, 개업 전에 매매·분양·경매·공매 등 다양한 분야를 자주 경험하고 공부해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