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관세폭탄의 원조 ‘스무트 홀리법’을 아시나요?
2018-03-02 14:32 송고(서울=뉴스1) 박형기 기자
미국 1930년 스무트 홀리법 채택 이후 대공황 맞아
2일 경상북도 포항시 포스코 포항제철소 제품창고에 제품들이 출하를 기다리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현지시간) 수입 철강에 25%, 알루미늄에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8.3.2/뉴스1 © News1 최창호 기자
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각각 25%와 10%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세계를 상대로 무역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전쟁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다.
◇ 미국 세계 무역체제를 흔들다 : 미국의 뉴욕타임스(NYT)는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 가격이 조금 비싸지겠지만 그것이 진짜 위험은 아니다. 문제는 미국이 구축한 국제 무역 질서가 훼손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NYT는 2차 대전 후 미국이 힘들게 구축한 세계 무역질서를 미국이 앞장서 폐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도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를 매기면 중국 등 다른 나라들도 보복관세를 매길 것이라며 이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근본적으로 흔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중국 뿐 아니라 캐나다와 유럽연합(EU) 등 미국의 동맹들도 이번 관세 폭탄에 강하게 반발하며 보복을 예고하고 있다.
◇ 트럼프 '판도라의 상자' 열였다 : 앞으로 세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보복 관세를 매기는 '보복관세의 악순환'이 지속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열지 말았어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조치는 미국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미국의 역사에 그 답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30년 미국 의회는 ‘스무트 홀리(Smoot-Hawley)법’을 통과시켜 수입품에 대규모 관세를 부과했다. 그 결과 미국은 1930년대 ‘대공황’이라는 사상 최악의 경제적 재앙을 맞는다.
◇ 미국 스무트 홀리법 제정 이후 대공황 도래 : 세계화는 금세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1800년대 말부터 1차대전(1914년) 직전까지 세계화가 정점에 달했다. 현재 세계화를 상징하는 것이 컨테이너와 인터넷이다. 당시 세계화를 상징했던 것이 증기선과 텔레그래프(전신)였다. 텔레그래프는 당시의 인터넷이었다. 대규모의 재화가 대서양을 넘나들었고, 인구이동 즉 미국으로의 이민이 정점에 달했다.
그런데 세계화의 단점이 나타났다. 부의 집중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과 똑같다.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은 사상최고의 실적을 올리고 있는데, 서민들은 직업을 빼앗기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미국은 자발적 고립을 선택했다. 미국 의회는 1930년 스무트 홀리법을 통과시켜 수입품에 대규모 관세를 부과했다. 재화의 흐름이 끊긴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은 1930년대 대공황이라는 사상 최악의 경제적 재앙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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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은 1929년 10월 29일 주가 대폭락이 아니라 이듬해인 30년 6월 17일 스무트-홀리법 제정 이후 시작됐다.”
『월스트리트 제국』을 쓴 경제역사가 존 스틸 고든의 말이다. 상식과 사뭇 다른 해석이다. 하지만 10월 대폭락 이후 상황을 꼼꼼히 살펴보면 일리가 있다. 다우지수는 29년 10월 대폭락 이후 하락하다 30년 들어 꽤 회복했다. 하락 폭의 절반 이상 반등했다. 소비와 기업 투자 등이 위축되기는 했지만 급감하지는 않았다. 그해 5월 허버트 후버 당시 대통령이 “공황은 끝났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 달 뒤인 6월 보호무역 법안인 스무트-홀리법 제정 이후 상황이 돌변했다. 영국과 프랑스·독일 등이 보복을 경고했지만 후버는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후버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이미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농산물 수입관세를 높인 상황이었다. 제조업계의 관세 인상 요구를 거부할 명분을 잃어버린 처지였다. 그의 서명 직후 세계는 무역전쟁에 돌입했다. 영국 등 20여 나라가 미국산에 대해 보복관세를 물리기 시작했다. 세계 시장은 블록화했다. 영국 파운드와 프랑스 프랑, 미국 달러를 바탕으로 3대 블록으로 분할됐다.
스무트-홀리법의 파장은 곧바로 나타났다. 1년 만에 미국 수출은 29년(52억4100만 달러)보다 30% 이상 감소했다. 기업 실적도 빠르게 나빠졌다. 은행 대출은 급속하게 부실화했다. 은행 파산 사태가 발생하면서 예금인출 사태(뱅크 런)가 벌어졌다. 그 여파로 회복세를 보이던 다우지수가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29년 폭락은 2개월여 지속되는데 그쳤지만, 스무트-홀리법 제정 이후에는 2년 반 넘게 하락세가 이어졌다.
이게 대공황의 시작이었다. 여기에는 거품 붕괴와 미 중앙은행의 고집스러운 통화 긴축 등도 큰 몫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미 경제가 침체와 공황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스무트-홀리법이 제정됐다”며 “그 법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대공황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경기가 침체하면 주요 국가에서 보호무역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대중의 요구를 좇기보다 교역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무역 적자 등 불균형은 다자간 환율 조정 등을 통해 바로잡으려 했다. 80년대 플라자 합의가 대표적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