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14
우리 사회에서 평화 담론은 대세다. 평화가 시대정신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면 위험하다.
전쟁을 원하는 반평화주의자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된 평화주의가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간다면 그것은 더 위험하다. 그래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현재의 방법으로 과연 평화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인지.제2차 세계대전 후 70년 동안 지속돼 온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는 무너지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의 세계 평화)에서 팍스 시니카(중국 주도의 세계 평화)로 헤게모니가 교체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국 우선' '중국 우선' 등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왜곡된 민족주의와 이를 가능케 하는 정치·경제적 토양이 확산되고 있다.
즉, 강대국들에 의한 홉스(Hobbes)식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조짐이 나타나면서 세계는 더 위험해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불안정해지는 세계 속에서 평화가 시대정신이라며 올인하고 있다. 마치 육식동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초식동물의 평화주의를 보는 것 같다.
'국방개혁 2.0'은 미사여구로 장식돼 있다. 필요한 내용도 있지만, 여건도 안 되는데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려는 부분도 있다. 보다 큰 문제는 한국 정부가 국가전략 차원에서 평화를 수단으로 평화라는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는 것이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이에 해당한다.
북한의 핵무장으로 남북한의 군사력 균형은 무너졌다. 그런데 하필 북한의 대남 군사 위협이 극대화된 시점에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려고 한다. 종전선언을 비핵화의 마중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은 평화의 기반이 조성되고 실질적인 평화가 왔을 때 해야 하는 것이다. 평화가 북핵으로 위협받고 있는데 평화가 왔다는 선언부터 한 후 평화의 기반인 비핵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기초 없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건물을 짓겠다는 것처럼 비현실적이다.
북한 외무성은 지난 7월 7일 성명을 통해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를 거부했다. 비핵화를 하더라도 일정 부분 핵무기를 보유하기 위해서다. 북한은 최근 대내외적으로 핵보유국이라는 표현 대신 '전략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런데 후자는 사실상 '핵을 보유한 자주적인 핵강국'을 의미한다. 김정은에게 완전한 비핵화의 의지는 없어 보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비핵화와 북한이 생각하는 비핵화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북한은 '평화 수호의 강력한 보검인 핵무기'를 결코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과 맞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것은 협상전략의 일환이다. 일단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이 이뤄지면 북한과 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으니 주한미군과 사드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며 철수를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비핵화를 거부할 것이다. 즉,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일정량의 핵무기를 은닉한 상태에서 그것대로 좋은 것이고, 철수하지 않으면 비핵화를 거부할 명분이 생겨서 좋은 것이다. 평화에 대한 접근 방법에서도 남북한은 이렇게 다르다.
한미동맹의 가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적 손익계산으로 흔들리고 있다. 미국이 향후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어떻게 재평가할지는 미지수다. 그런데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계기가 돼 주한미군 철수가 현실화할 경우 한반도 평화는 심각하게 위협받는다. 평화라는 이름 아래 결과적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평화를 위협하는 평화주의는 우리의 시대정신이 아니다. 위기가 위기인 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위기다. 그래서 평화가 아닌 위기 극복이야말로 시대정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상돈 한국외대 정치언론행정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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