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상품` 못키운 한국…노인들 `DLF`로 몰았다
문일호 , 이새하 기자
입력 2020.02.18
2009년 신탁업법 폐지된 이후
대안 없어 고위험상품에 `몰빵`
◆ 한국은 '신탁' 후진국 (上) ◆
서울 역삼동 소재 한 은행에서 최근 김 모씨(82) 유족들이 서로 김씨 돈을 찾겠다고 싸우는 소동이 벌어졌다. 김씨를 돌보던 그의 딸이 김씨 예금에서 돈을 찾아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다른 형제들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행에선 유언장에 따른 상속 완료 후 예금 지급이 가능하다고 중재했지만 유족 간 싸움은 계속됐다.
일본에서는 많은 노인들이 신탁상품에 가입하고 있어 이런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신탁의 한 종류인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하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신을 수익자로 정해 재산을 관리하고, 사망 후에는 자신이 정한 사람에게 원하는 방법으로 상속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신탁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국내 고령자들이 신탁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는 가입 절차가 번거롭고 다른 상품에 비해 혜택이 없는 데다 신탁상품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신탁이 활성화된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신탁업법이 2009년 자본시장법에 통합된 이후 유명무실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세제 혜택이 부여되지 않고, 상품 이용을 불편하게 하는 각종 규제 탓이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신탁상품은 광고·홍보도 안 되고, 상품 가입을 위해서는 반드시 금융사에 직접 찾아가야 한다. 다른 상품과 합쳐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합동운용'도 법에서 금지하고 있다. 또 신탁업자를 은행·증권·보험·부동산신탁사로 제한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로펌 등 다양한 기관에서 신탁 출시가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국내 신탁제도의 모태가 된 일본 신탁시장과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일본신탁협회·한국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일본 신탁 규모는 1224조1000억엔(약 1경3308조원)으로 우리나라 신탁(905조원)의 14.7배에 달한다.
신탁상품 부재는 국내 고령자들이 고위험 상품에 몰리는 요인도 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최근 문제가 된 파생결합펀드(DLF) 개인투자자 중 60대 이상이 48.4%를 차지했다.
금융당국은 2017년 신탁업법 분리를 추진했지만 정권 교체기와 맞물려 무산됐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고령자들이 자산 증식과 사후 대비가 가능하도록 국내 신탁시장이 하루속히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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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노인, 신탁에 손주 등록금 맡길때…韓노인, 투자처 못찾고 방황
문일호 , 이새하 기자
입력 2020.02.18
선진국은 국가차원서 신탁 육성
교육·결혼자금·자사株신탁 등
목적 따라 상품군 다양한 일본
비과세 등 절세 상속으로 각광
한국선 '신탁=위험상품' 인식
파생상품 끼워넣은 신탁 다수
稅혜택마저 없어 매력 떨어져
결국 DLF 등 위험 상품 기웃
◆ 한국은 '신탁' 후진국 (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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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에서는 가장 흔한 금융상품 중 하나가 바로 신탁이다. 다양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최근 들어 '셀프장례신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1만원에서 1억원까지 현금으로만 설정할 수 있는 이 신탁은 자신이 사망했을 때 장례비용 등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가족을 사후수익자로 지정할 수 있다. 유산분할 협의 과정 없이 사후수익자에게 금전을 곧바로 지급하므로 유족들이 고인의 자산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되고 있다.
일본은 일찌감치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다보니 '유언대용신탁'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신탁은 생전에는 신탁계약을 체결하는 자신을 수익자로 지정하고, 사후에는 배우자나 자녀, 자녀로 인정받는 타인 등을 수익자로 지정할 수 있다. 자신의 사망 이후 자금을 지급할 시기와 지급 방법을 맞춤형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신탁은 일본에 2006년 도입됐다. 한국에서도 2010년 일부 은행에서 출시되긴 했지만 혜택 부재와 가입 불편 등을 이유로 유명무실한 실정이다.
일본에서는 '후견제도지원신탁'도 대중화돼 있다. 이 신탁은 계약 체결부터 변경·해지까지의 결정이 가정법원 지시에 따라 이뤄져 법정후견인이 마음대로 자금을 인출·유용하는 부작용을 막고 있다. 일본신탁협회에 따르면 2012년에 도입된 이 신탁은 2018년 9월까지 수탁 건수가 2만1000건에 달했다. 2015년 대비 4배 급증했다.
신탁업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미국에선 어릴 때부터 신탁을 접하기 때문에 누구나 신탁 상품을 친숙하게 생각한다. 미국 인기 드라마 '가십걸'에서는 "부모 간섭 없고, 돈을 잘 쓰는 '트러스트 펀드 베이비(trust fund baby)'들과 안 놀아?"라는 대사가 나온다. 트러스트 펀드 베이비는 부모 또는 조부모가 물려주는 신탁을 갖고 태어난 세대를 뜻한다.
미국 호주 일본 등에서 신탁이 활발한 이유는 세 가지다.
신탁 계약으로 재산을 맡겨두면 향후 파산이나 압류 등 법적 분쟁에서 자유롭다. 예를 들어 신탁 계약자와 관리자가 파산해도 신탁 재산은 보호된다.
또 다른 장점은 죽음 이후 삶을 미리 설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성년자인 자녀를 위해 신탁으로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재산을 관리할 수 있다. 한국과 달리 각종 세제혜택을 주는 것도 차이점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신탁은 고위험 재테크 상품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은행권의 신탁은 '주가연계신탁(ELT)'으로 통할 정도로 그 비중이 높다.
ELT란 지수형 주가연계증권(ELS) 등을 편입한 특정금전신탁을 의미한다. 특정금전신탁은 고객이 신탁사에 자금을 맡기고 운용 방법을 정하면 신탁사가 그에 따라 고객 자금을 운용하는 상품이다. ELS를 직접 다룰 수 없는 시중은행은 ELS를 신탁 상품에 넣어 고객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신탁이 제 기능을 못하고 고위험 투자상품을 판매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은행 신탁 규모 265조원 중에 ELT는 41조원으로 전체의 15%다. 퇴직연금신탁(112조원)을 제외한 신탁 규모 153조원 중 26.8%에 이른다.
또 DLF 불완전 판매 피해자의 절반가량은 고령자로 나타났을 정도로 한국 노인들은 고위험 상품에 노출돼 있다. 신탁시장이 침체돼 있어 별다른 중수익 상품이 없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권 DLF에 가입한 투자자 3243명 중 개인 투자자가 3004명(92.6%)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연령별로는 60대 이상이 1462명으로 개인 투자자의 약 절반(48.4%)을 차지했다. 파생상품 투자 경험이 전무한 가입자의 투자금이 1431억원(21.8%)이나 됐다.
또 한국 노인들이 마땅한 투자상품을 찾지 못하다보니 주로 부동산 투자나 자영업 진입을 위한 대출을 늘리고 있어 금융 시스템의 잠재적인 위험 요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이후 작년 3분기까지 60대 이상의 가계대출 증가율은 연평균 9.9%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같은 기간 40대(3.3%), 50대(4.4%)는 물론 30대 이하(7.6%)의 대출 증가율보다도 높다. 이에 따라 전체 가계대출에서 한국은행은 고연령층의 경우 당장 재무 여력은 양호하지만 금융자산이 부족해 채무대응 능력은 떨어지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이 취약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60대 이상 가구의 처분가능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은 212.6%에 달한다. 하지만 총자산 대비 금융자산 비중은 15.5%로 부채를 쉽게 갚을 수 없는 처지다.
전문가들은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에 신탁업법이 포함돼 있는 것이 국내 신탁시장 성장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신탁업법이 분리돼야 그에 맞는 세금 체계를 확립하고, 신탁시장 참여자와 시장 규모 증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일호 기자 / 이새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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