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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펀드發 20조 기업 매물 쏟아진다.?인플레이션 우려 속 금리인상 본격화PEF "유동성 줄기 전에 투자금 회수하자"한온시스템·바디프랜드 등 보유매물 매각 속도

Bonjour Kwon 2021. 10. 4. 19:51
2021.10.04.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서 금리 인상 기조가 본격화하자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이 보유 중인 기업을 매각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시중 유동성이 줄어들면 인수자의 조달 비용 부담이 커져 높은 가격을 받기 어려워진다. 이에 따라 PEF들이 보유한 매물을 서둘러 쏟아내면 연말 인수합병(M&A) 시장에 ‘큰 장’이 설 것으로 전망된다.

4일 한국경제신문 자본시장전문매체 마켓인사이트에 따르면 PEF가 경영권을 보유한 기업 가운데 매각 절차가 진행되고 있거나 준비 중인 기업의 총 매각가격은 20조원에 달한다.

국내 M&A 역사상 최대 몸값으로 평가되는 한온시스템(한앤컴퍼니 보유·예상가격 8조원)을 비롯해 △바디프랜드(VIG파트너스·3조원) △현대LNG해운(IMM PE·5000억원) △버거킹(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4000억원) △투썸플레이스(앵커에쿼티파트너스·3000억원) 등의 기업이 PEF 손을 떠나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MBK파트너스, 한앤컴퍼니, 어피너티 등이 보유하고 있는 모던하우스, 쌍용C&E, 락앤락 등 조(兆) 단위 기업들도 내년 초까지 M&A 시장을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PEF들이 매각 작업을 서두르는 데는 금리 인상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투자은행(IB)업계는 보고 있다. 코로나19로 글로벌 유동성이 풍부해지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지자 한국은행을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이 잇달아 긴축 카드를 꺼내고 있다. 한은은 지난 8월 말 기준금리를 연 0.75%로 0.25%포인트 높였고 연내 추가 인상도 예고했다. 미국의 테이퍼링(자산매입 축소)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PEF는 금리와 투자 기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PEF는 인수대금 대부분을 빚으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아 금리가 오르면 이자 비용이 증가한다. 유동성이 사라지면 인수자들도 자금 압박이 심해져 ‘제값’을 쳐주기 힘들어진다. PEF의 수익률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IB업계 고위 관계자는 “기업들이 상반기처럼 공격적으로 M&A 시장에 뛰어들긴 쉽지 않은 환경”이라며 “PEF들이 보유한 기업을 연말께 내놓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금리 오르기前 '마감 세일'…알짜 기업 속전속결 거래 가능성
4분기 역대급 매물 대기 중

지난 8월 이뤄진 두산공작기계 인수전은 세아상역과 디티알오토모티브 간 2파전이었다. 두산공작기계의 전체 몸값 2조4000억원 가운데 2조원을 인수자가 직접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실탄이 풍부한 세아상역의 우세를 예상하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두산공작기계의 주인은 현금성 자산이 1900억원에 불과한 디티알오토모티브로 낙점됐다. 외부에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가능한 덕분이었다. 금융회사들은 1조원의 인수금융을 4%대 금리로 준다고 서로 나섰으며 디티알오토모티브도 회사채 발행 등 빚을 내기 쉬운 환경이었다.

이런 모습은 이후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추가 금리 인상을 예고하자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중견·중소기업들도 저금리와 넘치는 유동성에 기반한 ‘영끌 빚투(영혼까지 끌어모아 빚내서 투자)’에 나섰던 인수합병(M&A) 시장의 분위기가 급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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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각 저울질하는 PEF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은 새로 기업을 사들이는 포지션에서 보유한 매물을 내놓으려는 움직임으로 돌아서고 있다. 금리 인상 전 유동성을 활용해 높은 가격으로 보유 회사를 매각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저금리 수혜의 ‘막차’에 올라타려는 것이다. 국내 기준금리 인상에 이어 미국의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까지 시작되면 돈줄이 마르는 현상이 가속화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한 PEF 관계자는 4일 “PEF에 자금을 출자한 주요 연기금·공제회도 추후 금리 인상 등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매물을 팔고 펀드를 조기 청산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최근 들어 내고 있다”며 “투자한 지 4~5년이 지났으면서도 중견기업들이 관심을 보이는 보유 기업을 중심으로 매각 날짜를 조율 중”이라고 밝혔다.

PEF들이 다른 PEF의 매물을 인수하는 ‘세컨더리’ 시장도 금리 인상에 위축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상반기에는 잡코리아, 마제스티골프, 해양에너지·서라벌도시가스 등 굵직한 딜이 PEF끼리 거래됐다. 센트로이드의 테일러메이드골프 인수처럼 신생 PEF들까지 과감히 조 단위 자금을 끌어모아 대형 딜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연말부터는 이 경로도 닫힐 가능성이 크다. 국내 PEF 관계자는 “이전 같으면 충분히 자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프로젝트펀드 투자건이 공제회 심사에서 막혔다”며 “큰손들이 출자를 훨씬 더 깐깐하게 따지는 분위기”라고 했다.

시장에선 기업 몸값을 둘러싼 매각 측과 인수후보 간 눈높이 차이가 벌어지면서 딜이 지연되는 상황도 곳곳에서 생기고 있다. 한온시스템은 매각 본입찰 일정이 예정보다 두 달가량 밀렸지만, 양측 모두 뚜렷한 일정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막바지 호황 잡아라” IB도 분주
금리 인상기에도 M&A 시장은 반짝 호황을 맞는다. PEF들이 기업을 살 때처럼 팔 때도 거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7~2018년 1년간 기준금리가 0.5%포인트 올랐던 시기에도 PEF들이 대거 투자금 회수(엑시트)에 나섰다. 예컨대 칼라일은 보안업체 ADT캡스를 SK텔레콤에 넘기면서 3조원을 현금화했고, MBK파트너스는 오렌지라이프(옛 ING생명)를 2조2989억원에 신한금융지주에 팔았다. 한앤컴퍼니 역시 웅진식품을 대만 퉁이그룹에 매각하면서 약 2600억원을 챙겼다.

거래 성사에 따른 수수료가 주요 수입원인 IB들은 막바지 호황을 잡을 채비를 하고 있다. PEF가 공개적으로 매물을 내놓아 공개 매각 절차에 접어들면, 매각 완료 시까지 짧게는 4개월에서 길게는 1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렇게 되면 절차상 연내 매각 종결이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일부 IB는 PEF가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을 파악한 뒤, 먼저 인수 후보를 찾아 PEF에 연결해주기 위해 전략팀까지 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IB업계 고위 관계자는 “올 상반기만 해도 화려하게 ‘뷔페(공개경쟁매각)’를 차려놓고 손님들에게 알아서 찾아오라고 해도 회사를 제값에 팔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님을 특정해 얼마나 먹기 좋게 ‘정찬(수의계약)’을 차리느냐가 중요해진 시기”라고 했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