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

알고 있으면 행복한 협동조합기본법

Bonjour Kwon 2012. 11. 23. 18:08

이 글은 한살림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살림이야기’ 제17호(2012년 여름호)에 실린 김기태 소장의 기고 글인 「삶과 경제의 주체가 되는 법」의 초안 글입니다.

(글이 실린 살림이야기 바로가기 http://www.salimstory.net)




협동조합기본법?

협동조합기본법이 작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극적으로 통과되었다. 11월 초에 상임위에 법안이 상정된 후 2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상법과 민법에 비견할 만큼 적용 범위가 넓은 법이 통과되다니 역시 ‘다이내믹 코리아’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법을 시행하기 위해 준비할 것이 많아서 넉넉하게 시행일은 올해 12월 1일로 하고 준비기간을 1년으로 했다. 하지만 막상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고민하다 보니 1년도 짧은 기간이라는 걸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협동조합기본법은 그 이름답게 금융과 보험업을 제외한 어떤 사업도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운영할 수 있게 한 법이다. 이전에는 8개의 개별 협동조합법이 있었는데 2차 산업과 3차 산업 대부분에서 협동조합을 운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기본법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고 모든 사업영역에서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주택협동조합, 노동자협동조합, 복지사업을 담당하는 협동조합, 기존 주식회사나 유한회사의 협동조합 전환에 따른 법적 문제 등이 모두 수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나라 국민의 집단지성과 상상력은 매우 커서, 처음 기본법을 만들 때 생각도 못했던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다.


시대정신인 협동조합

1961년에는 농협과 수협, 산림조합 등 1차 산업 분야에서 협동조합을 할 수 있도록 법이 만들어졌다. 1970년대에는 금융사업을 할 수 있는 신협법과 새마을금고법이 제정되었고, 1998년에야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이 제정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대부분의 산업이란 1차 산업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그 법들만 만들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 1차 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 미만으로 낮아졌다. 대다수 국민은 2차 산업과 3차 산업에서 일자리를 찾게 되었다. 협동조합도 마땅히 이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도록 법 제도를 정비해야 했지만, 계속 지체되었다. 자신이 하는 어떤 일이라도 협동조합 방식으로 펼쳐 나갈 수 있도록 해 주는 법 제도가 없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에게 ‘협동조합’은 나의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교과서에서도 협동조합은 1980년대 이후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수출대기업의 성장에도 내수시장이 불황을 겪는 시간이 길어지고 일자리 문제에 대한 고민, 복지국가로 가는 데 필요한 ‘생산적 복지’의 구체적인 형태에 탐색 등은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의 자유로운 설립을 통한 민간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사업활동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으로 이어졌다. 작년 국회통과 시 여야를 막론하고 만장일치로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된 것은 이런 시대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협동조합이란?

생활협동조합, 농업협동조합 등 협동조합에 관해 들어 봤지만, 막상 협동조합이 무엇이냐는 정의를 말하려면 머뭇거리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협동조합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조직은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다. UN 산하 최대의 비정부기구인데, 현재 96개국의 267개 협동조합연합회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 회원의 조합원을 모두 합하면 대략 10억 명 정도이다.
국제협동조합연맹은 협동조합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업체(enterprise)를 통해, 공통의 경제․사회․문화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자율적인 인적결합체(association)’라고 정의하고 있다.
협동조합기본법은 이런 ICA의 협동조합 정의와 원칙을 가급적 반영했다. 법 제2조에서 협동조합은 ‘재화 또는 용역의 구매ㆍ생산ㆍ판매ㆍ제공 등을 협동으로 영위함으로써 조합원의 권익을 향상하고 지역 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사업조직’이라고 정의했다. 기본법에서는 ‘조합원의 권익 향상과 지역 사회 공헌의 목적을 가진 사업조직’이란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어, 인적결합체로서의 의의는 다소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다른 조문에서 최대한 충실히 반영하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출자금의 규모와 상관없이 1인 1표의 원칙을 못 박은 것이나, 협동조합의 사업에 ICA의 협동조합 원칙에 해당하는 ‘협동조합 간의 협동’, ‘조합원에 대한 교육과 홍보’,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 등을 포함한 것 등이 그것이다.


협동조합의 설립과 사업

협동조합의 설립 요건이 상당히 완화되었다. 우선 5명만 모이면 협동조합의 설립이 가능하다. 자본금의 최소한도도 없다. 또한, 일반협동조합은 시·도지사에게 등록만 하면 법인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주식회사를 만드는 것만큼 자유롭게 협동조합의 설립이 가능해졌다. 생활협동조합이 조합원 300명 이상으로 설립신고를 한 다음, 정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에 비하면 획기적으로 문턱이 낮아진 셈이다.
그러나 자유롭게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다고 어떤 사업이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금융업과 보험업종은 아예 금지되어 있고, 인허가가 필요한 사업은 관련 법령의 인허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주택협동조합을 만들려고 할 때는 주택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지역주택조합의 최소 요건인 20명 이상의 조합원이 필요하다. 위생 관련 사업을 하고 싶다면 그에 적합한 전문 인력이 있어야 한다. 협동조합을 설립하기 전에 사업계획을 꼼꼼히 세우면서 이런 점들도 검토해야 한다. 즉 일반적인 중소기업 창업에 필요한 준비가 되어야 한다.
다행히 그동안 생활협동조합이 운영하고 있던 ‘워커스 콜렉티브’의 사업들은 까다로운 인허가 사항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마을기업이나 마을공동체에서는 마을의 반찬가게, 도시락배달 등 소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는 사업이나 지역주민이 주로 사용하는 카페, 소극장 등을 협동조합으로 운영하려는 준비들을 많이 하고 있다.
당장은 사업 아이템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실망할 것은 없다. 협동조합은 이용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드는 사업조직이므로 생활을 차분히 관찰하다 보면 ‘나도 이런 일은 주위 사람들과 함께 힘을 모으면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드는 아이템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투명하고 지속가능한 운영을 위해

협동조합은 ‘법인(法人)’이다. 얼핏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법인은 법이 인격을 부여한 조직이란 의미다. 법이 보장한 사업조직이므로 개인사업자보다 사회적 공신력은 높지만, 그만큼 투명하게 운영해야 할 책임도 지게 된다. 따라서 회계처리나 회의록의 꼼꼼한 작성 등 조직을 운영하는 비용이 더 들어가게 된다. 특히 기본법에서는 협동조합의 공공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일반 영리기업보다 더 높은 투명성과 지속가능한 운영에 필요한 제도를 만들도록 요구하고 있다.
투명한 운영의 첫걸음은 운영의 공개이다. 협동조합은 결산 결과 등 운영사항을 적극 공개해 하는데, △정관ㆍ규약ㆍ규정 △총회ㆍ이사회 회의록 △회계장부 △조합원 명부 등을 사무소에 비치해야 한다. 또 대통령령이 정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협동조합은 시ㆍ도 혹은 연합회 홈페이지에 주요 경영공시자료를 게재해야 한다. 대략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에 요구되는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운영을 위해서 순수익이 생겼을 때 일반협동조합은 수익의 10%, 사회적협동조합은 30% 이상을 법정적립금으로 의무적으로 적립해야 한다. 이 적립금은 협동조합 자체의 소유로서 조합원의 지분으로 나눌 수 없다. 출자금에 대한 배당은 10%를 넘을 수 없다.


사회적협동조합

협동조합기본법은 일반협동조합보다 더 공익성이 높은 사회적협동조합을 따로 규정하고 있다. 사회적협동조합이란 ‘협동조합 중 지역주민의 권익ㆍ복리 증진과 관련된 사업을 수행하거나,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 또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는 협동조합’을 말한다.
이런 사회적협동조합은 일반협동조합보다 요건이 까다롭다. 주목적 사업이 40% 이상 되어야 하고, 배당이 불가하며, 해산 시 남는 돈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이런 엄격한 조건에 맞도록 정관을 작성하면 기획재정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이렇게 어렵게 공익적 성격의 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게 되므로, 일반협동조합과 다른 제도적 혜택이 있다. 우선 사회적협동조합은 ‘비영리법인’으로 명시해서 세제상의 혜택을 줄 수 있도록 했다. 민법상의 사단법인이나 재단법인처럼 정책적인 지원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정부의 복지사업이나 지역정책에 대한 위탁사업도 활성화될 것이다.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된 조직은 상당수 사회적협동조합으로 법인격을 전환할 것으로 기대되며, 농어촌지역의 복지사업이나 농어촌 개발 등은 물론, 도시재개발 사업이나 자활공동체 등 다양한 조직이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알면 행복한 협동조합기본법

협동조합기본법은 근로기준법과 같이 사회적 약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법이다. 근로기준법이 봉급을 받는 노동자의 인권을 포괄적으로 다룬 법이라면, 협동조합기본법은 삶과 경제의 주체가 되려는 사람에게 폭넓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살피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모르면 부당한 노동처우에도 어찌할 바를 모르듯이, 협동조합기본법을 충분히 알지 못하면 올바른 협동조합을 만들 수 없게 된다.
근로기준법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단결한 것처럼, 협동조합기본법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생활인들의 단결과 협동이 필수적이다. 협동조합을 통해 많은 이들이 행복으로 가는 열쇠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사)한국협동조합연구소 김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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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협동조합운동 사례와 시사점

 이 글은 공공운수노조연맹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공공운수노동자’ 8호(2012년 5월 31일 발간)에 실린 김기태 소장의 기고 글을 다시 전재한 것입니다. 글을 옮기는 것에 대해 양해바랍니다.

(글이 실린 공공운수노조연맹 바로가기 http://www.kptu.net)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선진국의 노동운동은 대부분 협동조합운동과 함께 발전해 왔다. 그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금 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난 부잣집 유한신사나 유한마담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생산자로서 노동자는 사람답게 살기 위한 권익을 높이려 기업 내 약자들이 힘을 모으는 조직체인 ‘노동조합’이 필요했다. 동시에 자본의 이윤추구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과도한 생활비에 짓눌리지 않도록 소비자로서 노동자는 지역주민과 함께 생활을 지키려는 조직인 ‘협동조합’이 필요했다.

최초의 협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작품

최초의 성공적인 협동조합인 영국의 로치데일공정선구자협동조합은 1843년 28명의 노동자가 모여 만들었다.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운동이 실패한 후 새로운 모색을 하는 가운데 협동조합운동이 제안되었다. 목적은 두 가지였다. ‘제대로 된 상품’을 공급하여 생활비를 줄이고, 노동자들에게 자립과 자주의 가치를 심어주는 일상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시로써는 상당히 혁신적이었던 ‘현금거래의 원칙’과 ‘이용액 배당’이 효과를 보면서 로치데일협동조합은 들불처럼 커졌다. 처음에 1인당 40만 원의 자본금을 모으기 위해 노동자별로 매주 5천 원, 당시 화폐로 2페니를 저금했다. 이것이 마법의 2페니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은 28파운드의 자본금은 협동조합이 활성화하면서 1년 만에 잉여금만 22파운드가 늘어났고, 이후 22년간 조합원 수는 50배, 자본금은 400배로 늘어났다. 당시 협동조합은 학교에 다닐 수 없는 노동자의 자녀를 위해 공부방을 만들었고, 협동조합이 필요한 밀가루 등을 만들기 위해 제분공장협동조합을 설립해 해고된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지역에서 시작한 운동이 이제는 전 세계 10억 명에게 일자리와 소득, 그리고 희망을 주고 있다.

노동자의 건강을 책임지는 일본의 의료협동조합

일본의 의료생협들은 초기에 노동조합과 협력하여 만들어졌다. 한신의료생협은 효고 현에 있는 의료생협이다. 1950년도 아마가사키에 있는 병원의 파업투쟁 이후 병원노동자 일부와 지역주민이 힘을 모아 진료소를 만들어 7~8년간 운영하다가 한신의료생협으로 전환했다. 현재는 5개 양방병원, 1개 한방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연대활동도 많이 하는데 재택방문 의료서비스 등 건강 복지와 노동자의 생활 예방과 반공해운동의 연대활동 등을 다양하게 하고 있다. 일본에는 이런 의료생협이 115개 운영 중이며, 조합원은 270만 세대가 넘고, 노동조합에 가입된 직원은 3만 명 정도 된다.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이탈리아 사회적협동조합

비공식부문은 언제나 노동운동의 뜨거운 이슈가 된다. 이탈리아는 고용통합을 위해 사회적협동조합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들은 지역사회의 협력을 바탕으로 영리기업이 고용하려 하지 않는 노동자를 고용한다. 2004년 통계에서는 약 2,500개 정도의 협동조합이 노동자를 고용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나폴리 등 남부 빈곤지역에서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사회적협동조합의 조합원은 27만여 명이며, 이 가운데 22만 명이 노동자 조합원이고, 그 중 2만 4천 명이 취약계층 노동자이다. 일반노동자의 활동이 비공식부문을 공식부문으로 전환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한국노동운동에 주는 시사점

이 외에도 벨기에의 ‘민중의 집’ 협동조합이나, 프랑스의 노동자협동조합, 스페인의 몬드라곤 등 노동자의 생활을 방어하고, 노동자에게 안정적이고 인간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다양한 협동조합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공장을 넘어서 생활공간 민주주의, 지역연대를 활성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전 세계의 협동조합운동과 노동운동이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 경험들을 심도 있게 검토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이다.



- (사)한국협동조합연구소 김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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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협동조합의 역사와 동향

 이 글은 한국여성노동자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일하는 여성’ 91호(2012년 8월 21일 발간)에 실린 김기태 소장의 기고 글을 다시 전재한 것입니다. 글을 옮기는 것에 대해 양해바랍니다.

(글이 실린 한국여성노동자회 바로가기 http://kwwnet2.cafe24.com)




1. 협동조합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협동조합의 역사는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이 출범한 1843년부터 시작하여 160여 년이라고 하지만, 이는 협동조합을 너무 좁게 보는 것이다. 협동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방식이었던 것은 인류 역사가 출발한 시점부터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이런 협동은 사라지는 듯 보였다.

수천 년간 경제를 책임졌던 공동체들은 시장의 논리 속에서 파괴되면서 사회와 경제는 분리되었다. 개인들의 경제생활은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이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분칠을 했다. 하지만 강한 개인은 자본의 힘을 빌려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자본은 없고 일할 수 있는 몸뚱이밖에 없는 대다수의 사람은 함께 힘을 모아 소득을 더 높이는 방법을 찾고, 생활비를 줄이는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와 협상을 통해 소득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필요했고,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소비자협동조합’이 필요했다. 공동체가 깨진 상황에서 질병이나 사고를 당했을 때 도움이 되도록 ‘공제조합’이 필요했다. 작은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신용협동조합’이 필요했다.

어느 시대에나 힘없는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삶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삶의 요구들이 있다. 이런 요구들을 사업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있었으며, 협동조합은 이런 사업적 해결 노력이 지속 가능하도록 제도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역사를 볼 때도 근대적 협동조합이 언제 들어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이뤄진 공동체의 역사와 그 성과를 먼저 바라보고, 그동안의 협동조합이 준 성과와 문제점을 균형 있는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럴 때만이 협동조합의 역사에서 지금 협동조합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


2. 전통적인 협동조직과 일제시대의 협동조합

우리나라에는 두레, 계, 향약 등 다양한 협동조직들이 폭넓게 활동한 전통이 흐르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업조직은 계인데, 계는 수 명 이상 수백 명이 결합하여 공동으로 정한 목적에 따라 규약을 정하고 공동으로 출자하여 사업을 수행했다. 계는 지금도 익숙한 이자를 불리는 것부터 농지를 구매하여 공동으로 생산하여 나누는 목적도 있었고, 산에 나무를 심는 식림계처럼 사회적협동조합 성격의 계도 있었다.

계원이 가입할 때 심사는 하지만 일단 계원이 되면 계 내부에서는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았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엄격한 계급사회였던 18세기 조선시대에도 이미 계는 ‘민주주의의 싹’을 품고 있었다. 사업이 잘되려면 발언권은 평등해야 했기 때문이다. 계의 운영방식은 이런 점에서 근대적 협동조합의 원칙과 비슷한 점이 많으며,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계모임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사회적 유전자로 깊게 뿌리박혀 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계가 가진 공동재산을 대부분 약탈하면서 계모임을 억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계는 살아남았는데, 3.1운동 이후 일제 총독부가 1920년대 계모임을 양성화한다는 정책을 발표했을 때 몇 개월 사이에 무려 3만 개의 계모임이 등록된 적도 있었다. 계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광범위한 협동조직의 전통은 일제의 탄압에도 지속해서 아래로부터의 협동조합 운동을 만들어 내는 동력이 되었다.

식민지 시대 일제 총독부는 통치의 수단으로도 사용하고 우리나라의 자금을 모아 만주지역의 개발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 ‘금융조합’을 만든다. 관제 협동조합의 시작이다. 이후 아래로부터의 협동조합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자 경제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산업조합’을 추가로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역의 특산품으로 사업을 제한하는 등 제대로 된 조합원의 자율성에 기반을 둔 협동조합이라고 할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협동조합 운동은 일본 유학생이나 종교계의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어 자발적인 아래로부터의 협동조합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협동조합 운동은 독립 운동의 한 형태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농민과 노동자의 조직활동과도 연결되었다.

1919년 독립만세 운동 이후, 경제적인 자립 없이 정치적으로 자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조선 민중은 1군 1소비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문헌상으로 남아 있는 가장 최초의 자발적 협동조합은 1920년에 설립된 ‘경성소비조합’과 ‘목포소비조합’이다. 이후 1927년부터 민족주의적인 일본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와 천도교가 주축이 된 ‘농민공생조합’, 기독교 YMCA가 조직한 마을단위 협동조합들이 확산되었다.

농민공생조합은 국산장려운동의 목적으로 ‘고무신 공장’을 만들어 조합원에게 판매함으로써 일본의 3대 재벌이었던 미쓰이 물산을 긴장시켰고, 원산총파업 당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한 노동조합의 소비조합이 있었기에 원산총파업은 길게 지속할 수 있었다. 1930년대 큰 흉년이 닥치자 협동조합은 만주의 좁쌀을 공동으로 구매해 저렴하게 판매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생존을 도왔다.

이런 일제 식민지 시대의 활발한 협동조합의 활동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따라서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었지만, 계속 확산하여 1930년대 초반에는 대략 1천여 개의 협동조합과 10만여 명의 조합원이 협동조합 운동을 함께 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부터 파시즘으로 돌아선 일본의 대대적인 협동조합 지도자의 구속과 탄압, 협동조합 자산의 몰수가 진행되었고 1937년 총독부의 협동조합 폐쇄명령에 따라 아래로부터의 협동조합 운동은 소멸되었다.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과 협동조합 운동은 아주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식민지 협동조합 운동의 발전과 몰락에서 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3. 개발시대의 협동조합

경제발전이라 하지 않고 개발시대라고 한 것은 위에서 정한 경제개발의 시나리오대로 우리나라가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협동조합도 같은 상황에서 위에서 정한 발전경로를 따라왔다. 1961년 농협법과 산림조합법, 수협법,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이 거의 동시에 제정되었다. 대통령이 농협중앙회장을 임명하고, 농협중앙회장이 군 농협조합장을 임명하는 이상한 구조가 1989년까지 계속되었다. 민주적 운영이라는 협동조합의 중요한 정체성이 거세된 협동조합에 1차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정부의 지원제도와 자원이 투입되었다. 상호금융사업을 도입하고 농사자금을 제공하며, 쌀 수매를 대행시키는 등 다양한 지원제도에 의해 농협은 농민들의 경제활동을 활성화하는 데에는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농수협 등 우리나라의 초창기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의 정체성은 부족하지만, 협동조합의 사업적 효과는 크게 나타나는 기묘한 결합을 통해 발전해 왔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뤄진 이 시기에도 여전히 아래로부터의 협동조합에 관한 열망은 있었다. 1960년 부산과 서울에서 설립된 ‘신용협동조합’은 캐나다 신협운동의 영향을 받아 건강한 흐름을 이어나갔다. 새롭게 신협을 만들려는 지도자와 회계 담당자는 ‘협동조합교도봉사회’의 9일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협동조합의 원칙과 정체성에 대한 설명부터 구체적인 회계처리방법까지 교육을 수료하면 신협을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되었다.

신협은 당시 자립하려는 사람들에게 크게 환영받게 되어, 전국 각지에서 신협 조직 열풍이 불었다. 1973년에는 277개 조합을 회원으로 하는 신용협동조합연합회가 만들어지고, 신협의 사회경제적 의의를 받아들여 신협법이 제정되게 되었다. 아래로부터 이뤄진 협동조합 운동의 첫 제도적 결실이었다.


4. 민주화, 87년 체제와 협동조합운동

1987년 6월 항쟁으로 정치적 민주화는 성큼 앞서 나갔지만, 경제 민주화는 현재까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재벌중심의 경제구조가 더욱 강화되어 왔고, 그 속에서 대다수 국민도 ‘대기업 중심 경제성장을 통한 내수시장 활성화’란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경제 민주화는 작년까지 대중적인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또한 급격한 정치 민주화 속에서 좋은 인재들이 경제 민주화와 협동조합 운동에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하지만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협동조합 운동은 계속되었다. 1980년대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한살림과 두레연합, 아이쿱 등으로 대표되는 생협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이제 50만 명 이상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매출액 1조 원을 돌파하면서 경영의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그동안 생협운동은 단순한 사업적 안정화뿐만 아니라 도농상생, 친환경농산물의 생산과 소비, 윤리적 소비 등 현재는 국민적 상식이 된 내용을 가장 앞서 주장함으로써 국민의식과 정책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농협도 20년간의 농협민주화운동의 성과로 1989년 조합장 직선제가 이뤄지고, 농협중앙회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의 분리가 역시 20년 가까운 농협개혁운동으로 달성되는 등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하는 지속적인 협동조합 정체성 찾기 활동이 전개되었다. 직선제를 통해 좋은 조합장이 선출된 농협들은 민주적 운영과 경제사업 활성화에서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다수의 농협과 농협중앙회는 더 많은 혁신이 필요하다.

신협도 1980년대 초반까지의 활력이 사업의 안정화 단계에 도달하면서 조합원과 임직원의 적극적인 협동조합문화가 쇠퇴하게 되었다. 협동조합기업들에 대한 대출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조합원들의 예금을 운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주택담보대출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협동조합금융의 정체성이 약화되었다. IMF 이후 부실대출을 정리하면서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어려움을 겪었는데, 최근에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이 시기 협동조합들의 움직임을 보면 협동조합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는 제도적 정비도 중요하지만, 협동조합의 인적자원을 개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수한 협동조합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조합원들에게 지속해서 협동조합의 정신과 가치를 교육하여 협동조합의 인적자원을 튼튼하게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한다.


5. 자유로운 협동조합설립의 열망과 협동조합기본법 제정

도시빈민운동의 발전방향 모색과 IMF 후 노동자기업인수운동과 실업극복운동, 그리고 이를 확대 발전시킨 자활운동 등 다양한 흐름은 자신들의 운동방향을 위해 공업과 서비스업 등에서 자유로운 협동조합의 설립을 20여 년간 열망해 왔다.

민간진영의 연대활동과 사회적기업의 제도개선에 대한 필요성, 정치권의 복지국가에 대한 합의 등으로 이런 20여 년의 열망이 2011년 12월 마침내 ‘협동조합기본법의 제정’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제 다양한 사업에서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으며 특히 자활과 돌봄, 육아 등에서 협동조합 설립이 특히 기대된다. 지난 100여 년의 한국 협동조합 운동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제대로 된 협동조합 운동이 확대 발전되도록 협동조합의 지도자와 현장의 많은 활동가, 조합원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하겠다.



- (사)한국협동조합연구소 김기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