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07
믿을 신(信)에 맡길 탁(託)이다. 은행에 돈을 믿고 맡기면, 은행이 돈을 알아서 굴려주는 상품이 신탁이다. 예금은 원금보장이 확실한 대신 이자는 쥐꼬리다. 반면 신탁은 은행으로 하여금 보다 위험도 높은 곳에 투자하도록 해서 배당수익을 얻는 방식이다. 신이 인간에게 앞날을 내다보도록 내주는 메시지인 신탁(神託)과 발음이 같다. 예지력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점도 같다.
은행권 신탁은 금전신탁과 재산신탁으로 나뉜다. 금전신탁은 고객의 돈을 은행이 받아서 굴려주는 분야로 수신 개념이다. 재산신탁은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사람들이 부동산 채권 유가증권 등을 맡기며 현금화하는 것으로 여신 개념이다. 재테크 방편으로 은행권 신탁이 급증한다고 말할 땐 금전신탁 만을 지칭하는 것이다. 국내은행의 금전신탁은 2013년말 130조3149억원 규모에서 지난해말 185조6491억원으로 늘었다. 4년 만에 55조원 넘게 급성장했다.
금전신탁 급성장의 직접 배경은 낮아도 너무 낮은 예금 금리다. 시중은행 예금 금리가 1%대에 머무는 데도 요구불예금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갈 곳 없는 돈이 넘쳐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펀드 상품을 접하며 금융투자에서 원금 손실을 볼 수도 있다는 인식. 은행이 그런 걸 팔수도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다소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예·적금 이상의 수익을 기대하는 고객들이 뭉칫돈을 들고 신탁을 주시하는 것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신탁을 ‘바구니’라고 표현한다. 고객이 맡긴 돈을 불리기 위해 은행은 투자 종목으로 바구니를 채우게 된다. 이때 주가지수에 연동해 손익을 결정하는 것으로 채우면 주가연계신탁(ELT)이다. 바구니를 펀드로 채우면 상장지수펀드(ETF), 채권으로 채우면 채권형신탁이 된다.
우리은행 ELT 상품의 구조는 이렇다. 가입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코스피200과 유로스톡스50이 원래보다 85% 미만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연 4.30% 배당수익률을 제공한다. 고객 입장에선 은행 정기예금과 같이 6개월 동안 돈이 묶여있는 점은 같다. 그런데도 주가지수가 올라가면 보통 예금 금리의 2∼3배인 배당수익을 얻을 수 있다. 물론 반대로 지수가 폭락하면 원금 손실을 보는 식이다. 0.1∼1%의 신탁보수도 내야 한다. 또 손실 가능성 때문에 고령자 등에겐 신탁 철회가 쉽도록 투자자 숙려제도를 운영 중이다.
신한은행은 지난달 중위험 중수익 신탁상품 3종 세트를 선보였다. ‘동고동락(同苦同樂)’ 신탁은 코스피200 지수에 연동하는데, 4%의 목표 수익률을 내지 못하면 은행은 성과보수를 받지 않는다. 고객과 아픔을 함께한다는 의미에서 ‘동고동락’이다. 최대 손실 한도를 -2%로 제한한 ‘손실제한 상장지수채권(ETN) 특정금전신탁’과 15개국 거래소에 전부 분산투자하는 ‘글로벌거래소 특정금전신탁’도 내놨다. 개성 넘치는 각자의 방식으로 바구니를 채운 신탁 상품들이다.
은행이 부자에게만 제공하던 유언신탁 치매신탁 펫신탁 등 이색 신탁 상품도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은행권 신탁의 주류는 아니지만, 과거 VIP들의 전유물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KEB하나은행은 지난달 ‘가족배려신탁’을 출시했다. 고액자산가만 가입했던 상속상품을 보급형으로 내놓은 게 특징이다. 본인이 사망하면 가족들이 부담없이 장례 세무 채무 등을 처리하도록 설계된 상품이다. 월납형과 예치형으로 나뉘는데 예치형은 1계좌당 최저 500만원부터 5000만원까지 가입 가능하다. 하나은행은 2010년 금융권 최초로 유언대용신탁과 2016년 치매안심 성년후견지원신탁을 내놓은 바 있다.
KB국민은행 역시 지난해 본인 사후 강아지에게 최소한의 품위유지비를 물려줄 수 있는 펫 신탁을 국내 최초로 선보였다. 국민은행은 강아지에 대한 반응이 좋자 곧바로 고양이도 적용가능한 상품을 내놨다.
글=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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