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신탁(국제자산신탁등)

‘한국의 트럼프’ 문주현 MDM그룹 회장의 성공 방정식

Bonjour Kwon 2018. 8. 31. 22:41

2018.08.31

담대한 상상력으로 황량한 땅에 가치를 심다

 

[인사이트코리아=조혜승 기자] 뉴욕 스카이라인의 변신을 이끈 도널드 트럼프, 샌프란시스코 규모의 놀이시설인 MGM 스튜디오를 늪지대에 건설한 월트디즈니, 중국의 상권 중심지인 베이징 왕푸징에 랜드마크 둥팡광창을 만든 리카싱. 황량한 토지에 상상력을 가미한 ‘토지 셰프’라 불리는 부동산 디벨로퍼는 도시를 변화시키는 마법사다. 멋진 건축물은 시민의 행복지수를 높여주고 관광객에겐 볼거리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문주현 MDM그룹 회장. <뉴시스>

국내 손꼽히는 디벨로퍼인 문주현(61) MDM그룹 회장은 부동산 업계선 ‘한국의 트럼프’ ‘살아있는 이순신’으로 불린다. 문주현 회장은 2007년 해운대 ‘대우월드마크 센텀’부터 판교 ‘푸르지오 월드마크’, 광교 ‘더샵 레이크파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개발 신화를 남겼다. 문 회장은 지난 8월 18일 서울 매경미디어센터에서 열린 리더스포럼에 강연자로 나서 자신의 도전과 성공,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숙성시킨 철학을 밝혔다. <인사이트코리아>가 그의 강연 전문을 정리해서 싣는다.

 

사람들이 ‘한국의 트럼프’라고 얘기한다. 디벨로퍼란 무엇인가. 디벨로퍼는 땅을 사서 설계, 시공사 선정, 입주 분양까지 전체 과정을 조율하는 코디네이터다. 음악으로 치면 마에스트로, 악기를 다룰 줄 모르지만 전체의 화음을 맞추는 능력자다. 지휘자가 잘하면 멜로디가 나오고 화음이 되지만 잘못하면 소음이 된다. 홍콩, 뉴욕 맨해튼, 두바이 어촌마을, 싱가포르를 디벨로퍼가 바꿨다.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무형의 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서울도 뉴욕 같은 도시가 될 수 있다. 요즘은 중국, 미국 간다고 안 하고 뉴욕, 홍콩, 상하이 간다고 한다. 그 도시를 보러 가는데 무엇을 보러 가나? 도시 건축물 속에 담겨 있는 유통·쇼핑·외식 등을 접하러 가는 것이다. 요즘 도시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4차 산업혁명 얘기하는데 도시가 ‘스마트 시티’로 생활 속에 들어오는 게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

 

“가난한 어린 시절 무협지 읽고 바라는 세상 꿈꿔”

어렸을 때 무협지를 많이 읽었다. 시골에서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다닐 때 밤에 할 일이 없어 무협지를 주로 읽었다. 상상력을 통해서 세상을 꿈꿨는데 꿈도 마찬가지다. 상상을 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서울이 ‘콤팩트 시티(압축 도시)가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지킬 것은 지키지만 낙후된 곳은 과감하게 개발해야한다. 도시의 발전 개념이 달라져야한다는 말이다. 나는 디벨로퍼로 불리기를 원한다.

 

1971년 중학교 2학년 때 시골에서 있었던 얘기를 영상으로 만들어봤다. 내 고향은 우리나라 최남단 전남 장흥이다. 이순신 장군이 배 12척 숨긴 장소가 바로 고향 앞이다. 그때는 김, 미역양식을 재래식으로 했다. 김 농사를 망친 매생이 때문에 고생했다. 지금은 몸에 좋다지만 그땐 씻어서 팔고 팥죽 한 그릇 먹고 학교에 가곤 했다. 농사를 지었는데 농약을 뿌리다 중독이 돼서 3일 동안 물만 먹고 겨우 깨어났다.

 

 

중학교 졸업하고 국비로 직원훈련원 가서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는지 전교 1등을 했다. 그런데 1등해서 뭐 하나란 생각이 들었다. 30~40년 후를 생각해보니 공장장밖에 안 되겠다 싶었다. 인생 한번 태어났는데 공장장이 내 꿈일 순 없지 않나. 20살 때 검정고시를 3개월 만에 합격하고 군대갔다온 후 27살에 경희대학교 회계학과에 들어갔다. 당시 야전잠바에 율무차가 주식이었다. 형편상 돈이 없어 도서관에 있다가 후배들이 커피한잔 하자고 하면 무조건 율무차를 먹었다. 지금 생각하니 매생이도, 율무차도 몸에 좋은 것만 먹고 자랐던 것이다(웃음).

 

대학 졸업 후 나산실업에 들어가 죽기 살기로 일했다. 거기서 승부를 못 보면 인생 끝이었다. 현금 100만원 가지고 결혼했다. 일하다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다. 31살에 입사해서 36세에 이사, 상무가 됐다.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 때 회사가 부도났다.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할까 방황했다. 부도 날 줄 몰랐고 준비가 전혀 안 됐다.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 되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이 때 대기업에서 50평 아파트 주고 개발사 사장 자리 준다는 스카우트 제안도 왔지만 ‘한 번 태어났는데 너 잘났으면 한 번 해봐라’란 목소리가 내 속에서 들렸다. 요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는데 재밌는 말이 나오더라. 부잣집 아들이 부잣집 여인한테 꽃을 선물하면서 ‘꽃처럼 살자’고 얘기한다. 그 여인(김태리)은 열사이면서 아씨인데 ‘불꽃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 그 대사가 멋있었다. 한번 태어났는데 화끈하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월세 20만원짜리 원룸서 1998년 창업”

그래서 결단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10평짜리 원룸 오피스텔을 월 20만원 주고 얻어 사무실을 냈다. 회사 이름 짓는 것이 중요했다. 그땐 동네이름·고양이이름, 삼성·금성과 같은 별 이름을 따 사명을 짓곤 했다. 그때는 내세울 게 이름뿐이라 MDM(Moon Developmnet Marketing), 내 이름을 걸고 사명을 지었다. 그런데 미국은 전부 이름 걸고 하더라. 이름을 걸고 1998년 4월에 사업을 시작해 딱 20년 됐다.

 

돈이 없으니 시드머니를 만들어야 했다. 을·병·정을 하면서 기획·마케팅·분양 등을 했다. 4만 세대를 분양하는데 분양급여 16조 중에서 분양대금으로 천 몇 백억을 (시드머니로) 신한은행으로부터 받았다. 개발 사업을 하기 위해 신도시 하나를 만든 것인데 이것으로 종자돈이 생겼다. 2007년 이후 본격적으로 개발 사업을 시작했고 10년 만에 부산을 중심으로 연면적 95만평 정도, 약 11조원의 땅을 개발해 순자산 1조를 만들었다. 단돈 5000만원 가지고 맨주먹으로 20년 만에 2조를 벌었다는 것은 놀랍지 않나.

 

“가난을 자식에게 물려줄 건가? 과감하게 판 바꿔야”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변에 자수성가한 사람 많다. 이 사회가 불공정하면 나 같은 사람이 성공할 수 있겠나. 돈, 배경, 집안 없이 오직 아이디어와 자기 노력과 발로 뛰어서 만들어냈다. 검증 다 받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젊은이들이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얘기하는데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도전해 봤나, 노력해봤나. 해보지도 않고 왜 사회 탓을 하나, 국가 탓을 하나. 가난하면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줄 건가. 과감하게 자신의 대에서 판을 바꿔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캠코(자산관리공사)가 갖고 있는 한국자산신탁 M&A를 시작했다. 그땐 조그만 시행사가 신탁을 인수한다는 자체가 사회 정서적으로 안 맞았다. 요즘 디벨로퍼가 미국 대통령이 돼서 알아주지만 그땐 (디벨로퍼를) 업자 취급했다. 감히 업자가 금융기관을 인수한다고 말이 많았다, 미래에셋, 하나자산 등 9개 회사 상대로 경쟁하는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 직원들이 그 당시 안 된다고 난리쳤지만 결과는 인수에 성공했다.

 

나약한 사람은 스스로를 약하게 생각하고 해낼 수 있을지 의심한다. 그런데 구멍을 무엇으로 뚫나. 작은 송곳이 구멍을 뚫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크다고 뚫는 게 아니다.

 

한국자산신탁을 10배 키워 상장시켰다. 인수할 때 연 270억 매출에 100억원 이익이던 걸 작년에 2200억 수주에 1200억 이익 냈다. 정부의 첫 성공사례라고 말한다. 디벨로퍼라서 오히려 부동산 신탁을 잘할 수 있었다. 이어 개발과 부동산 신탁, 캐피탈, 운용사 등 모든 플랫폼을 만들었다. 유학 갔다 온 것은 아니지만 이 플랫폼이 선진국 모델이라고 하던데, 한눈 안 팔고 집중하다 보니 무엇이 필요한지 보였고 뭔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일례로 라마다 르네상스의 경우, 삼성생명과 우리가 붙었다. 직원이 말이 안 된다고 말렸지만 직접 담당자 만나서 ‘비싸게 주면 살 것 아니냐’고 아이디어를 냈고 (라마다 르네상스를) 매입했다. (그 건물을) 테헤란로 사옥으로 삼고 간판을 달았다. 현재 그 곳에서 개발부문과 디벨로퍼 부문 3개사, 금융부문 신탁·캐피탈·운용사 등을 운영 중이다.

 

최근 서울 강남 삼성역에 제2사옥을 마련했다. 앞으로 삼성역이 교통 중심지가 될 것이니 부동산 투자할 때 참고하시기 바란다. 바로 삼성 메디슨빌딩인데 10개 회사가 붙었고 결국 우리가 샀다. 이 지역은 5~10년 후 용도가 바뀔 것으로 전망한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문주현 MDM그룹 회장이 지난 8월 18일 서울 매경미디어센터에서 열린 리더스포럼에서 강연하고 있다.<조혜승>

성공하려면 생각이 남달라야 한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절대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자기 인생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가다 보면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고 재미없고 돈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스톱을 해야 한다. 내비게이션을 잘못 맞출 수 있다. 그러면 수정해야 한다. 수정하는 용기가 중요하다.

 

시골에서 영농 후계자로서 이장과 미역공장 경영 등 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라는 세상이 아니기에 27살, 기득권 다 포기한 것이다. 같은 해 경희대 회계학과에 입학해 7살 후배들과 대학 다녔다. 회사에 들어오니 경리부에 배치됐다. 남의 뒤치다꺼리하는 기장 일 못하겠다고 했다. 인문학 공부한 사람이 갈 수 있는 영업·마케팅 하겠다고 지원했더니 왜 하필 마케팅 영업을 하려고 그러느냐는 말을 들었다. 영업하면 보험이나 자동차 세일이고, 조금 고급스러운 것이 제약회사 세일즈였던 탓이다.

 

하지만 영업·마케팅이야말로 시장을 알 수 있고 마케팅을 잘하면 회사 매출과 시장 점유율이 달라지고 돈을 벌 수 있다. 권력 지향적이면 정치인, 명예 원하면 교수, 나머지는 기업을 하든지 뭔가 해야 할 것 아니겠나. 몇 번을 바꿨는지 모르겠다. 대학 전공인 회계학 잘 모른다. 전문적인 것은 회계사 쓰면 된다.

 

부동산 개발할 때 용적률·분양률·전용률 등 너무 어려웠는데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어렵게 느낀 것이다. 한 강의를 들었는데 어떤 분이 사람한테는 ‘편견’과 ‘선입견’이란 개가 있다고 했다.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는데 두 마리 개를 ㅤㅉㅗㅈ아버리는 개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것이다. (이 사업도) 들여다보니 건달이 하고 있을 정도로 별 것 아니었다. 대학도 나오고 잘난 사람인데 왜 못하겠나 싶었다.

 

“멀리 보는 안목 있다면 성공 한다”

창업에서는 안목이 굉장히 중요하다. 멀리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모두 성공할 수 있다. 집값 오르면 집 사면 되고, 주식 오르면 주식 사면 된다. 떨어지면 팔면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까.

 

미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제러미 래프킨이 사람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0.1% 창의적인 인간, 0.9% 안목 있는 인간, 99%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잉여인간이다. 창의적인 인간은 우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안목이나 통찰력은 예측할 수 있다. 바람이 불고 태풍이 불면 비가 오겠다고 예상한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는가.

 

돈을 번 사람은 통찰적 인간이다. 역사적으로 18세기 방적기를 만든 사람은 0.1% 천재다. 0.9%에 속한 사람은 이것을 보고 ‘원단이 많이 필요하겠다’고 예측한다. 감자밭을 갈아엎고 양을 많이 키우게 된다. 99%는 옆집이 돈 벌었다고 뒤따라서 감자밭에 양목장을 만든다. 이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예로 19세기 헨리포드가 차를 발명했다. 이때 0.9%에 속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록펠러다. 그는 향후 자동차 대중화 시대가 올 것으로 보고 미국의 정유공장, 주유소 90% 이상을 샀다. 록펠러는 발명을 하지 않고도 미래 시장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 미국 석유시장 90%를 장악한 것이다.

 

네이버는 삼성SDS출신 몇 사람이 만든 것 아는가. 네이버가 연 4조2000억 매출에 7000~8000억원 이익을 낸다. 생각해보시라. 인터넷으로 메일 보내고 컴퓨터로 가상의 세계에서 산 다는 게 신기한 때가 있었다. 지금 언론들이 네이버 밑에 들어가 있다. 네이버에 언론이 종속됐는데 검색을 네이버에서 하지, 신문 이름을 치지 않는다. 그런 시장이 올 것이라고 생각 안했나. 이 사람들은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시장을 만들어서 돈 벌었다. 미래를 예측하면 돈 버는 게 너무 쉽다.

 

하지만 예측 못하면 어떻게 되나. 130년 된 일본 코닥이 망가졌다. 디지털 카메라가 1975년 나올 것이라고 제일 먼저 예측했고 임원회의까지 했다고 한다. 이들은 필름 공장이 많이 있으니 시장 점유율을 더 높여 디지털 카메라가 못 들어오게 하는 잘못된 의사결정을 했고 결국 망했다. 한마디로 연탄 공급 많이 해서 가스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겠나. 판이 바뀌었는데 기존의 판으로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나.

 

“집도 명품처럼 고부가가치 만들어야”

예전엔 공장·자본·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지식을 팔고 핸드폰, 검색, 게임 등을 파는 아이디어를 내야지 돈 빌려서 공장 짓고 이런 것은 아니다. 대기업에서 짓기만 하고 비싸게 팔지를 모른다.

 

집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주거, 오피스텔, 상가, 쇼핑몰을 하는데 아이디어를 가지고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된다. 고부가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부산 월드마크 센텀에서 시공사 지급보증 없는 PF(Project Financing)를 처음으로 디벨로퍼로서 했다. 최초 성공 사례다. 이 내용이 현재 대학원 교과서에 나온다. PF는 프로젝트를 보고 돈을 빌려주는 것인데 우리 금융회사는 후진적으로 반드시 담보를 잡거나 시공사 지급보증 등을 요구했다.

 

프로젝트를 보고 성공할 것 같으면 돈 빌려주고 아니면 안 빌려주면 되는데 왜 보증을 서라고 하는지, 그것은 담보대출이고 관행이라는데 PF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은행과 디벨로퍼가 머리를 맞대서 소프트웨어로서 머리 역할을 제대로 했다.

 

직접 신한은행과 담판했다. 이익을 은행과 나누자고. 우리 둘이 시행사 역할을 하고 수수료, 금리를 주고 공사비 아끼고 헤게모니를 잡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이 같은 내용을 신한은행이 2007년에 처음으로 시행했다. 그 당시 부산 집값이 평당 800~900만원이었는데 우리가 최초로 2배인 1600만원을 받았다. ‘주위에서 문주현 회장이 돈 번거 말아먹으려고 마지막 용을 쓰는 구나‘라고 빈정거리는데 진짜 용을 썼다. 계약금 오픈할 때 20%, 3개월 만에 100% 됐고 이 프로젝트로 1600억원 벌었다.

 

회계법인 보고서가 정말 많이 나오는데 옆 건물 시세 +5%, +10%가 시장가격이라고 하는데 이 가치가 맞는 건가. 가치는 백화점 명품관 가면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가치를 왜 주변과 비교하나. 좋은 위치, 좋은 상품인데 옆의 가격과 같이 받느니 우린 두 배를 받으라 한다. 20억짜리 집들이 3개월 만에 다 팔렸다. 집이 명품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판교 푸르지오 월드마크다. 2000만원 임대 보장하고 3년 후 넘겨주는데 LH는 1700만원에 분양했다. 우린 임대를 2000만원에 주는데 LH가 1700만원에 파는 게 맞는 일인가. 지금은 4000만원씩 20억원에 팔리고 있다. 공공기관이 태클을 안 걸었으면 더 많이 팔 수 있었다.

 

문정동 송파 푸르지오 시티도 있다. 한화가 3200평 프로젝트로 250억원 이익을 낸 그 동네에서 우린 땅도 적은데 30억원 가지고 1000억원 이익을 냈다. 모 저축은행장이 어느 날 문주현 회장이 부동산에 대해서 잘 아니 번 돈을 다 대겠다고 했다. 그 대신 이익을 반만 나누자고 했다. 우리 7, 행장이 3으로 합의했다. 땅 780억원에서 70억원을 금융기관에서 빌리려 했는데 은행에서 결재가 안 났다. 임직원들이 시야가 좁아서 주무르고 덜덜 떨고 윗선에 못 올렸던 것이다. 바로 행장에게 전화해서 신용으로 50억원 빌려달라고 하니 그 다음날 바로 받았다. 은행을 끌어들여 금리와 공사비가 내려가다 보니 옆 사람보다 4배 수익률이 났다.

 

2700평 광교 푸르지오 월드마크, 이 땅이 재밌다. 토지 리턴제라고 아는가. 디벨로퍼들의 롤 모델이 된 이유가 이 프로젝트에서 12억원을 가지고 1000억원을 만들기 때문이다. 은행에 100억원을 빌려주라고 하면서 담보가 되는 증서다. 이후 설계부터 마케팅까지 분양이 잘 됐다. 시행사인 대우와 GS에서 수주전이 붙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경사진 땅이었다. 사람들은 경사진 땅을 싫어하는데 실제로 좋은 땅이다. 용적률은 지상 용적률만 계산하고 지하는 계산 안한다. 반지하 상가를 다 팔아서 650억원이 나왔다. 반지하라서 금싸라기 땅인 것이다. 반지하를 1층으로 만들어 돈 벌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전공에 대해 정말 집중해서 미친 듯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계탑도 만들었다. 로드상가에 만남의 광장, 분수, 아이들 놀이터 등을 갖춰 랜드마크가 됐다.

 

“삼시세끼 식사 나오는 아파트 광고 보신 적 있나”

혹시 삼시세끼 식사 나오는 아파트 광고 보신 적 있나. 우리가 국내 최초로 만들었다. 광교 더샵 레이크파크 얘기다. 7월말 기준 우리나라 세대가 2000만 세대다. 그중 아파트가 1000만 세대인데 붕어빵처럼 아파트만 지었지 주부를 위한 아파트가 있나.

 

예전에 인터뷰를 한 번 했다. 붕어빵 아파트 그만 지어라, 올 봄에 새로운 아파트를 만들어보겠다 해서 광교 신도시에 10년 동안 안 팔린 땅을 사서 호텔 서비스를 집에서 받는 아파트인 ‘아파텔’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호텔처럼 클럽하우스를 만들었다. 삼시세끼 다주고 북카페, 와인바, 수영장, 헬스클럽, 사우나는 기본이고 애들 놀이교실, 실내체육관을 만들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부대시설을 만든 곳이 있나. 우리나라 주거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아침만 해준다는 흉내만 내는 아파트들이 나오는데 그건 사기다. 은퇴한 부부들이 점심, 저녁은 어떡할 건가. 아침만 해준다는 건 진정성이 없다. 아파트 뒤 호수 있고 대히트 쳤다.

 

도전하는 용기가 우리에게 부족하다. 있는 사람들은 잘 못한다. 우리같이 벼랑 끝에 있는 사람은 밑져야 본전이라 안 할 이유가 없다. 가정 생각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사업하면 안 된다. 우리처럼 도전적이고 성취적이고 만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면 사업해야 한다. 불꽃처럼 살다 가려면 화끈하게 해야 한다. 죽을 땐 빚도 안 가져간다.

결국 삶의 원동력은 간절함이다. 성공에 대한 간절함이든, 뭘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이든 이거 아니면 죽겠다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전쟁에서 배수진을 치면 거의 성공한다. 안 싸우면 죽게 되기 때문이다. 앞만 뚫고 가면 산다. 우리에게 간절함이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실수할 수 있지만 결국 끈기, 인내, 지속성이 있느냐가 관건이다. 직장 다닐 때 사장에게 부도나기 전엔 회사 안 나간다고 하다가 부도나서 나갔다.

 

열정이란 지속성이다. 직장에서도 ‘일에 미친놈’이란 소리 들으며 일했다. 성공하겠다는 열망과 하는 일에 최고가 돼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회사 일을 내 일이라고 했다. 그러다 5년 만에 쓰러져 1년간 산속에서 요양하기도 했다. 그땐 죽어선 안 되겠다 싶었다. 산속에서 인생을 새롭게 조명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실패를 딛고 올라서는 용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잘못된 길이다 싶으면 본전 생각하지 말고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 버스 잘못 탔으면 스톱하고 내려서 다른 버스를 타야 한다.

 

“창업 후 10억 벌어 5억원으로 장학재단 설립”

사회는 우리라는 테두리에서 개인을 희생시키는데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내가 있어서 회사, 세상, 우주가 있다. 주체가 돼야 하는 일에 만족하는지, 잘한 건지, 행복한 건지 알 수 있다. 전체 행복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은 조직도 원하지 않는다. 매사에 주체적 생각, 주관적 생각을 사회 틀에서 올바르게 키우면 훨씬 보람 있을 것이다. 요즘 ‘흙수저’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하는데 듣기도 싫고, 큰 병이다. 내가 이 땅의 주인, 우주의 주인, 회사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다 보인다. 생각이 중요하다.

 

좌우명은 ‘빚지고 살지 말자’다. 잘해주면 확실하게 잘해주고 못 살게 반칙하고 양아치 짓하면 보복한다. ‘화끈한 문주현’으로 소문나 있다.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대학 3~4학년 때 너무 가난해서 장학금 받기 위해 자기 소개서를 썼다. 시골에서 겪은 직업훈련원 얘기를 썼는데 서울대와 한양대만 주는 전액 장학금을 직접 받게 됐다. 그때 스스로 ‘세상에 아무 조건 없이 장학금을 주는 좋은 사람이 있구나, 세상에 빚을 졌으니 꼭 후배들에게 10~100배까지 갚겠다’고 다짐했다.

 

자본금 5000만원짜리 회사 만들어 10억 벌고 난 후 5억원 들여서 장학재단 만드니 직원들이 정치하려고 하는가보다고 했는데 자신과 약속을 지키려고 한 일이다. 2001년 장학재단을 설립해 장학기금 총 출연액 368억원, 대학생 2387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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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현(61) MDM그룹 회장 프로필

1987년 경희대학교 회계학과 졸업

1998년 MDM그룹 창립

2001년~문주장학재단 이사장

2010년 한국자산신탁 인수

2012년 한국자산캐피탈 설립

2014년~한국부동산개발협회 제3대 회장

2015 경희대 총동문회 자랑스러운 경희인상 수상

2015년~한국자산에셋운용 회장

2017년~한국부동산개발협회 회장

2017년~한국부동산경제단체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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