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용 "현재의 기업 환경서 제2의 삼성전자·현대車 나오기 어렵다"
2018-10-10
창간 54주년 - 혁신성장, 성공의 조건
혁신성장의 길을 묻다
(2) 윤종용 前 삼성전자 부회장
규제 줄이지 않는 것은 부정부패 용납하는 '범죄'로 봐야
근로시간 단축·최저임금 인상으로 일하고 싶어도 일 못하는 사회 돼
세계적 기업 10번 이상 압수수색…기업인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
이런 환경선 기업가정신 못살아나
지배구조 놓고 기업 압박하는 건 공정위 설립 취지와 다른 문제
'불공정 거래'에만 초점 맞춰야
기업인들 상속세 부담에 회사 포기
한국 사회 귀한 자산 사라지는 것
윤종용 前 삼성전자 부회장 "근로시간 단축은 국민을 ‘게으름뱅이’로 만드는 일"
윤종용 前 삼성전자 부회장 "근로시간 단축은 국민을 ‘게으름뱅이’로 만드는 일"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74·한국공학교육인증원 이사장)의 삶은 ‘삼성의 성장사’와 궤를 함께한다. 그가 삼성그룹에 입사한 해는 1966년. 삼성전자가 설립되기도 전이었다. 1968년 서울 을지로1가에 있던 삼성 본관에서 당시 이병철 회장이 삼성전자 설립을 위한 팀을 구성했다. 입사 3년차 신입사원이었던 그도 이 팀에 합류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69년 삼성전자가 설립됐다.
2008년 삼성전자 고문으로 물러날 때까지 ‘삼성맨’으로 42년을 일했다. 그는 ‘샐러리맨의 신화’로 통한다. 최고경영자(CEO)로 18년이나 근무했다.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인 1997년 1월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뒤 과감한 구조혁신을 통해 회사를 세계 최고 정보기술(IT) 업체로 탈바꿈시켰다는 평을 듣는다.
10일 서울 역삼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윤 전 부회장을 만났다. “지금의 기업 경영 환경을 어떻게 진단하느냐”고 묻자 “고(故) 이병철 삼성 명예회장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일궜던 기업가정신이 사라져가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두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였다. 그의 말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막힘이 없었다. 오후 3시30분께 시작한 인터뷰는 해가 저물 때쯤 끝났다.
▶한국을 지탱해온 제조업이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위기감이 큽니다.
“한국 제조업이 위기를 맞은 것은 중국을 비롯한 중진국들의 부상과 제조업 부활 정책을 추진한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경쟁력 향상 등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기업인들이 경영혁신과 개혁에 대한 의욕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게 가장 큰 원인입니다.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는 ‘1960~1980년대 중반 한국은 세계에서 기업가정신이 가장 충만한 나라’라고 말했죠. 지금 우리 기업들에서는 그때의 역동성과 활력을 찾아볼 수 없게 됐어요.”
▶기업가정신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치권은 지난 30년 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업 때리기’에 나섰어요. 규제라는 ‘칼날’을 갖다 대면서 말이지요. 경제 실패에 대한 책임을 대기업에 돌리면서 반기업 정서를 부추겼죠. 기업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기업인들이 치열해지는 경쟁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안심하고 투자하고, 인력을 새로 채용하며 기업을 확장시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그는 이날 ‘규제’라는 단어를 열 번 이상 언급했다. 그만큼 규제 개혁의 필요성이 시급하다는 의미에서였다.)
정권 바뀔 때마다 ‘기업 때리기’
▶역대 정부는 ‘전봇대’, ‘손톱 밑 가시’를 언급하며 ‘규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런데도 기업인들은 여전히 규제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정부가 노력하는데 규제 개혁이 이뤄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만큼 역대 정부가 규제 개혁에 대해 ‘되면 좋지만, 안 돼도 어쩔 수 없다’는 미온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믿음과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는 규제가 늘어날 수밖에 없죠. 규제는 부정부패 먹이사슬의 시발점입니다. 규제가 강할수록 ‘(부정한 로비로 인한) 떡고물’도 많아지죠. 정경유착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위층이 하지만, 규제로 인한 부정부패는 지방의 말단 공무원에게까지 권한을 쥐여 줍니다.”
▶정부가 규제개혁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규제를 줄이지 않는 것은 부정부패, 불법적 로비와 결탁하기 위한 수단을 용납하는 ‘범죄’로 규정해야 해요. 강력한 ‘규제 실명제’를 도입하고, 규제로 인해 발생한 손실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책임을 지게 해야 합니다. 그게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예외가 없어야 하죠.”(한국은 1996년 행정규제 완화를 목적으로 규제를 새로 만든 공무원의 이름을 명기하는 ‘규제 실명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규제로 발생한 손실이나 부작용 등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아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규제 강할수록 ‘떡고물’ 많아져
▶기업들은 공정거래위원회의 각종 규제가 경영을 힘들게 한다고 하소연합니다.
“지나친 독과점과 불공정 거래에는 당연히 합리적인 규제를 해야 하죠. 다만 공정위는 ‘불공정 거래’를 단속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시장의 원리를 무시하고 불공정거래를 통해 사리사욕을 챙기는 기업이 있다면 엄중히 처벌해야 하죠. 하지만 지배구조를 놓고 기업을 압박하는 것은 공정위의 설립 취지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미국 등 선진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해 공정위의 기능을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뿌리 깊게 자리잡은 반(反)기업 정서도 기업인의 사기와 의욕을 꺾고 있다는 지적이 많은데요.
“우리가 자랑해야 할 세계적인 규모의 기업들을 몇 개월 동안 열 번 이상 압수수색하는 나라입니다. 기업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환경에서는 기업가정신이 왕성하게 살아날 수 없어요. 무엇보다 정부가 앞장서 기업 친화적으로 바뀐다면 기업가들의 사기가 살아나고 기업 경영이 활성화될 것입니다.”
▶기업 경영을 힘들게 하는 정책도 쏟아졌습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기업 경영에 악재(惡材)가 되는 정책만 나오고 있어요. 최저임금 문제만 하더라도 시장에서 노동의 수요와 공급, 노동자의 생산성에 따라 결정돼야 합니다. 정부의 힘에 의해 획일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죠.”
▶지난 7월부터 시행된 주52시간 근로제의 부작용도 적지 않습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일하는 것이야말로 가난을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죠. 우리 국민은 50년 전부터 열심히 노력해 빈곤에서 벗어났으나, 아직 1인당 소득이 3만달러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근로시간 단축을 통해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었어요. 60~70년 전처럼 국민을 ‘게으름뱅이’로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닌지 우려됩니다.”(그는 1970~1980년대 삼성전자에서 일할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일거리가 별로 없는데도 관리자들이 근로자들에게 잔업과 특근을 시켰다. 제품 판매는 안 되는데 잔업을 하니 재고가 쌓였다. 사장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관리자에게서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여사원들이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 돈을 못 보낸다면서 일을 더 하고 싶다고 합니다.” 부장급 관리자는 시말서(경위서)를 쓰면서 이들에게 잔업과 특근을 시켜줬고, 회사도 이를 눈감아줬다.)
공정위 기능 축소 방안 검토를
▶주52시간 근로제 도입으로 중소기업의 타격이 크다고 합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조카에게 들으니 월급이 줄어들지 않도록 더 일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요. 회사가 사람을 더 뽑고 싶어도 비용부담 때문에 인력 충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요. 사람을 한 명 더 뽑을 때마다 임금 외에 상여금부터 각종 수당까지 들어가는 비용이 적지 않습니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돈을 벌어보지 않고, 세금을 내보지 않은 사람들은 돈 무서운 것을 모르는 거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도 논란거리입니다.
“비정규직 근로자를 모두 똑같은 근로자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능력이 있고 성실한 사람은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까지 한꺼번에 전환할 수는 없는 것이죠. 정규직 전환으로 신규 채용을 늘리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그는 이 대목에서 대뜸 기자에게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정치’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풍요롭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사는 것’을 원해요. 그렇다면 정치인의 역할은 국민이 풍요롭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인들은 ‘표’를 얻는 데 더 골몰하죠. 정치권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도,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결국 기업입니다. 정치인들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하면서 ‘반기업 정책’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근로시간 단축을 통해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일자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개인과 기업이 만들어내는 일자리와 공무원, 공공기관 등 정부가 만드는 일자리입니다. 앞의 것이 95%라면 뒤의 것은 5%에 불과하죠.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린다고 하지만 이는 경제 체질 강화에는 도움이 안 되고 국민 부담만 증대시키는 일이에요.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SK하이닉스 청주 M15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일자리는 기업이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정부가 좀 더 일찍부터 ‘친기업 행보’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일자리 창출은 기업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용 창출을 위해서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커야 하는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기업이 되면 적용받는 규제가 많아지니 중소·중견기업인들이 회사를 성장시키지 않으려고 하죠. 오히려 회사를 쪼개거나 가업 승계를 포기해 버립니다. 상속세를 감당하지 못해 회사를 팔아버리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어요. 한국 사회의 귀한 자산이 사라지는 것입니다.”(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다. 여기에 대주주 할증 30%가 추가되면 65%에 달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징벌’ 수준의 최고세율 탓에 가업 승계를 포기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올해 국내 500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가업 승계 때 가장 큰 애로사항이 무엇인지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67.8%가 ‘상속, 증여세 등 조세 부담’을 꼽았다.)
▶그렇다면 ‘혁신성장’의 요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혁신성장이란 경제 주체인 기업이 혁신을 통해 사업을 성장시키는 것을 의미해요. 기술 혁신을 통해 신사업, 신제품을 만들고, 생산·마케팅 방식을 혁신해 이전의 방식을 타파하며 경영 전반을 혁신해 성장하는 것이죠. 이를 주도하는 것은 결국 기업가정신입니다.”
일자리 만드는 것은 결국 기업
▶위기에 처한 제조업을 부흥시키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요.
“자원이 부족하고 시장 규모마저 작은 한국에서는 제조업이 산업의 주축이 돼야 합니다. 일본의 ‘모노즈쿠리’ 정책, 미국의 제조업 부활 정책처럼 정부가 나서야 합니다. 해외로 진출한 기업의 국내 유턴 정책, 기술 개발에 대한 세제지원 등 필요한 지원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죠. 중견기업 하나를 키우는 데도 20~30년이 걸립니다. 중소·중견 제조 기업의 가업 승계를 지원하기 위해 양도세·상속세 개편, 차등의결권 부여 등을 검토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제2의 삼성전자, 현대자동차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삼성전자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50년의 세월이 걸렸어요.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들에 기대를 걸어봐야 하지만, 각종 규제에 가로막혀 있는 경영 환경을 고려했을 때 제2의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탄생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겁니다.”
■약력
△1944년 경북 영천 출생
△1962년 경북사대부고 졸업
△1966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삼성그룹 입사
△1990년 삼성전자 가전부문 대표이사
△1995년 삼성그룹 일본 본사 사장
△1997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
△1999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2004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한국전자산업진흥회장
△2008년 삼성전자 상임고문 △2011~2015년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
△2004~2017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장
△현 한국공학교육인증원 이사장
인터뷰 전문은 www.hankyung.com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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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이 혁신의 최대 敵…정권 지지층과도 과감히 맞서라"
입력 2018-10-10
창간 54주년 - 혁신성장, 성공의 조건
(2) 규제혁파, 이번엔 제대로 하자
‘규제개혁 전도사’를 자처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올 들어서만 국회와 정부를 수차례 방문했다. 굳이 세자면 국회는 네 번, 정부는 열 번 이상 찾았다. 기업이 뛸 수 있게 규제를 제발 풀어달라는 호소를 하기 위해서다. 박 회장은 “상의 회장을 맡은 4년 남짓한 기간 정부에 제출한 게 23번, 각종 발표회에서 건의한 게 15번, 모두 합해 38차례 규제개혁 과제를 전달했다”며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규제개혁은 정권마다 ‘명운’을 걸고 추진해온 과제다. 규제혁파 없이는 신(新)산업·고용 창출은 고사하고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다. 하지만 실행은 다른 문제다. 규제개혁을 막는 갖가지 장벽은 도처에 널려 있고, 오히려 규제를 양산하는 공무원 집단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민화 KAIST 교수(전 벤처기업협회장)는 “규제와 혁신은 명백하게 반비례 관계”라며 “규제를 풀지 않고선 혁신성장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규제혁파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1. 기득권 '진입장벽'을 깨라
한번 생긴 규제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기득권의 저항 때문이다. 진입장벽이 낮아지면 시장 참여자가 늘면서 경쟁이 격화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규제개혁을 언급할 때마다 “가장 큰 적(敵)은 기득권의 저항”이라고 말했다.
수년째 바뀌지 않는 저비용항공사(LCC) 시장이 대표적이다. 항공기가 한 대 도입될 때마다 일자리가 최대 2600개 창출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으로선 새 사업자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LCC 시장 진입규제로 오히려 대기업 계열 항공사들이 과점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다. ‘승차공유’(카풀) 같은 서비스는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는 데다 소비자 이익과 부합하는데도 택시업계 반발로 시도가 막혀 있다. 대표적 차량공유업체인 우버는 일찌감치 퇴출됐다. 정보기술(IT)업계 관계자는 “전 세계가 승차공유 모델을 허용하는 추세인데 우리만 목소리 큰 이익단체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하소연했다.
2. 시민단체 벽을 넘어라
지난 6월27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 규제개혁 점검회의가 당일 오전에 돌연 취소됐다. 당초 은산분리(산업자본의 은행소유 제한)·개인정보보호 규제 완화 등을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반대에 부딪힌 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국회에서도 관련 논의가 이뤄질 때마다 진보 시민단체들은 “규제 완화가 공익적 가치를 침해할 우려가 크다”며 반발했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규제개혁에 가장 크게 반발하는 집단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군’으로 분류돼온 진보 시민단체다. 사회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 시민단체의 벽을 넘지 못하면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처럼 개혁 과제들이 좌초할 위험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시민사회 진영에 오래 몸담았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마저 “진보진영의 개혁 조급증과 경직성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개혁이 실패할지 모른다”고 경고했을 정도다. 이병태 KAIST 경영대학 교수는 “요즘 행정부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만큼 힘이 없다”며 “정권을 잃을 수 있다는 각오로 지지층과도 맞서는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할 것”이라고 했다.
3. 원칙을 갖고 여론을 설득하라
‘투자개방형 병원’ 건립은 김대중 정부 때 처음 시도됐다. ‘경제자유구역법’을 제정해 근간을 마련했다. 이후 노무현 정부는 물론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의료 선진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투자개방형 병원을 추진했지만 매번 무산됐다. 이익단체 반발의 벽도 높았지만 무엇보다 여론전에서 패했던 게 주요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투자개방형 병원이 의료 기술과 서비스를 발전시켜 국민에게 더 나은 혜택을 준다는 논리를 적극 내세워 여론을 설득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영리병원’이나 ‘의료 민영화’라는 이익단체 논리에 휘말려 정부가 먼저 두 손을 들었다”고 지적했다.
4. 가능한 대안부터 실행하라
지난달 말 우여곡절 끝에 국회 문턱을 넘은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선 사안에 대한 ‘모범 답안’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과거 16년간 흔들리지 않던 은산분리 규제 완화의 첫 단추를 끼웠다는 점에서다. 산업자본의 인터넷은행 지분 한도는 종전 4%에서 34%로 높아지게 됐다.
그동안 은산분리 완화를 놓고 ‘핀테크(금융기술) 및 금리·수수료 경쟁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찬성론자와 ‘은행이 산업자본의 사금고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반대론자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다 대주주 대출 금지, 대주주 보유기업에 대한 지분취득 제한 등 절충안이 나왔다. 한국경제연구원 관계자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중국 알리바바와 같은 세계적인 핀테크 기업을 배출할 수 있는 첫걸음은 뗀 셈”이라며 “일반은행의 규제 완화도 차츰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5. 부처 칸막이(silo)를 없애라
국무조정실 부패척결추진단이 작년 초 ‘공무원 규제개혁 저해 행태’를 점검한 결과 무사안일한 일처리 등이 210건 적발됐다. 규제 남용 및 타 부처 떠넘기기도 적지 않았다. 복합의료부지에 체육시설 허가를 내줬다가 취소해 기업에 2억4000만원의 손실을 입힌 사례도 있었다.
공무원들이 보신주의에 빠져 관련법을 엄격하게 ‘해석’만 하는 관행이 여전하다. 하나의 신산업을 놓고 부처끼리 서로 자기 영역이라고 다투는 탓에 규제가 더 꼬이는 사례도 많다. “공무원이야말로 규제의 공범”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규제를 쥐고 있는 공무원이 움직이지 않으면 혁신성장과 일자리 창출도 요원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경고다. 국무조정실 민관합동규제개선추진단 관계자는 “국회에서 통과된 정보통신융합법 개정안 등 규제 샌드박스법의 경우 민원인 질의 후 30일 안에 회신하지 않으면 규제가 없는 걸로 간주하는 내용이 포함됐다”며 “기업들이 공무원의 무사안일주의 등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란 점에서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라고 소개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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