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발밑의 판이 움직이고 있다
최초입력 2019.07.24
7월 4일 일본은 대법원 징용 판결을 이유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요한 핵심 소재 수출을 규제한다고 발표했다. 우리가 중재 절차에 불응할 경우 추가 조치를 취하겠다고 압박한다. 일본의 일방적 제재 조치는 지금까지 한일 관계의 틀로는 설명이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미국과 동맹을 공유하는 이웃 사이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일본 측 설명이 오락가락하지만, 대법원 판결이 도화선이 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지난달 워싱턴 회의에서 커트 캠벨 전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를 만났다. 그는 현 국제 정세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끝나고 있다.
둘째, 리처드 닉슨 방중 후 이어온 미국의 대중 관여 정책은 끝났다.
셋째, 미국의 향후 역할에 대한 불확실성이 역내 안보불안 요소가 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현대 국가로 등장한 한국에, 캠벨이 말하는 상황은 낯설다.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지금과 많이 다를 것만은 틀림없다.
첫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이 공공재로서 제공해온 안보와 시장에 값을 매기고 있다.
ㆍ왜 미국 돈으로 한국과 일본의 안전을 지키느냐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미국 세계 전략의 뿌리를 흔드는 발상들이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의 패권 경쟁을 선언했다.
ㆍ2017년 12월 안보보고서와 2018년 1월 국방보고서에서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명시했다. 지난 5월 중국의 대표 정보기술(IT) 기업 화웨이에 미국의 첨단기술과 장비를 제공하지 못하게 했다. 중국이 일당독재를 하는 한, 국가와 기업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본다. 화웨이라는 특정 기업이 아니라 중국의 일당독재 체제를 문제 삼는다.
4월 말 키런 스키너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은 미·중 갈등을 말하면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문명과 싸움을 시작하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더 크기 전에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냉정하게 보자. 일본의 조치는 미국 대중 제재의 판박이다.
일본이 수출 규제를 발표하면서, 한국이 놀라 당장 중재위 회부에 응하기를 기대했을까?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일본이 유리하다고 봤을 것이다.
한국 제조업은 서방 기술과 자본에 의존하는 구조다. 일본의 존재감이 크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적어도 그동안은 일본이 승인과 허가권을 통해 상황을 주도하고 한국 IT 산업을 압박할 수 있다. 청구권 문제에 진전이 없더라도 손해는 아니다.
미국은 이 상황에서 선뜻 나설 동인이 없다. 일본의 조치를 나무랄 근거도 마땅하지 않다. 이로써 해묵은 한일 과거사 갈등이 완화되면 좋고, 중국이 어부지리를 얻는 일만 없다면, 한국 IT 산업이 약해진다고 안타까워할 일도 아니다.
우리 발밑의 판이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패권 행사 방식이 바뀐다. 자유, 동맹, 시장경제 등 지난 70년 동안 당연시하던 개념들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오고 있다.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제재를 가하는 것은 일본이지만,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몫이다. 최고의 외교는 국민적 합의다. 중국에 추월당한 이래 일본은 초조하다. 우리를 떠밀어낼 처지는 아니다. 우리로서는 기술과 원료 수입선 다변화와 국산화를 모색하면서 여유를 갖고 버텨야 한다. 맷집도 키워야 한다. 전쟁이 아닌 한, 국가 관계에서 일방의 완전 승리나 완전 패배는 없다. 한미동맹은 앞으로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버팀목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조병제 전 국립외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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