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10
"탈세·재산 은닉에 악용"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파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초고층 아파트인 타임워너센터 58층 B호는 애나 팡이란 젊은 중국 여성이 2004년 210만달러(약 23억원)에 구입했다. 하지만 구입 당시 애나 팡은 컬럼비아대 학생으로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중국 국부 펀드 계열사인 CICC 부회장이던 그의 아버지 팡펭레이가 딸 명의로 이 아파트를 산 의혹이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이 아파트 74층 B호는 2010년 1565만달러(약 171억원)에 팔렸다. 매입자가 '25CC ST74B LLC'라는 회사로 돼 있어 그동안 실소유주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뉴욕시 부동산 자료를 1년간 추적 취재한 결과 이 아파트 소유주가 러시아의 전 상원의원이자 은행가인 비탈리 말킨(62)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말킨은 캐나다에만 111채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지만 자금 출처를 입증하지 못해 러시아 정부의 조사를 받고 있다.
구입자 신원이나 자금 출처를 따지지 않는 허술한 규정 때문에 세계의 '검은돈(hidden money)'이 뉴욕의 고가 아파트로 몰리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8일 보도했다. 검은돈의 숨은 전주(錢主)들은 페이퍼컴퍼니(서류상 회사)나 차명(借名)으로 거래하기 때문에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작년 뉴욕시에서 500만달러(약 55억원) 이상에 거래된 주거용 부동산의 54%는 페이퍼컴퍼니에 팔렸다. 페이퍼컴퍼니의 고가 주택 구입 비율은 2008년 39%에서 6년 만에 15%포인트 높아졌다. 센트럴파크 인근의 주상복합 아파트인 '원57'은 소유자의 77%가 페이퍼컴퍼니다.
타임워너센터의 경우 192채 중 64%인 122채가 페이퍼컴퍼니 소유다. 실소유주는 대부분 미국 기업 CEO(최고경영자)나 유명 연예인, 스포츠 스타, 변호사, 의사 등 신분 공개를 꺼리는 명사들이지만, 이 중 최소 16명의 외국인 소유주들이 개인 비리나 회사 부정행위로 체포됐거나 조사받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작년 가을 타임워너센터 아파트를 2140만달러에 산 그리스 기업인 드미트리어스 콘토미나스는 작년 1월 부패 혐의로 그리스에서 체포됐다. 9·11 테러범들에게 자금을 지원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전 미국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인 반다르 빈 술탄 왕자도 이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다.
외국인 전주 명단엔 콜롬비아나 말레이시아 같은 개발도상국 관료나 측근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콜롬비아 정치인인 파블로 아딜라는 주지사 시절 부패 혐의로 콜롬비아 정부의 조사를 받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청년 금융가인 조 로(33)는 1억4000만달러를 들여 뉴욕과 LA의 고가 아파트들을 매입한 후 이 중 2채를 나지브 라자크 말레이시아 총리의 양아들에게 팔았다.
뉴욕타임스는 "탈세나 재산 은닉을 노리는 검은돈들이 페이퍼컴퍼니를 내세워 당국의 추적을 피하고 있는데도 미국 정부가 이를 방치하고 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8일자 1편을 시작으로, 뉴욕의 고가아파트 실소유주를 추적한 '비밀의 타워(towers of secrecy)' 시리즈를 총 5회에 걸쳐 연재한다고 밝혔다. 총론 성격의 1편에 이어, 2편은 말레이시아 금융인, 3편은 인도 건설업자, 4편은 멕시코 정치 브로커, 5편은 러시아 장관과 측근들을 다루기로 했다. 뉴욕타임스는 시리즈에 등장하는 총 17명의 실소유주 명단도 웹사이트에 예고했다. 국적별로 미국 4명, 러시아 3명, 중국·인도 각 2명이고, 영국·사우디아라비아·콜롬비아·그리스·멕시코·말레이시아가 1명씩이다. 한국인은 명단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