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장희] 그게 다 트럼프 때문일까
2018.04.05
자칭 ‘협상가’인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도 미국과의 이번 담판은 쉽지 않았나 보다. 통상 분야는 항상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해 왔던 그였지만 생소한 상대 스타일에 적잖이 놀란 눈치다. 그는 지난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결과 브리핑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8년 동안 백악관에 있을 것 같은데 그동안 계속 리스크가 있을 것”이라는 소회를 밝혔다. 김 본부장은 예측 가능성 측면에서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미국은 정치동맹과 경제동맹을 동일시한 전통적인 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상황이 조금 꼬인다 싶으면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며 압박했다. “한국은 무역에선 동맹이 아니다”는 말로 전방위적 무역 보복을 시사하는가 하면, 자국민 일자리를 핑계로 한국산 세탁기 등에 15년 이상 접어둔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벌이고 있는 ‘무역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국 내에서도 곱지만은 않다. 일각에선 1930년대 높은 관세정책으로 인해 미국 경제가 대공황에 빠진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주요 언론도 관세로 무역장벽을 쌓으면 일시적으로 미국 내 고용이 늘 수 있지만 결국 미국 소비자들에게 부담이 전가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아니었다면 달라졌을까. 이 대목에선 의견이 엇갈린다. 트럼프가 지지층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리한 무역전쟁에 나섰다는 시각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누적된 경제정책 실패가 극단적인 재편을 약속한 트럼프를 지도자로 선택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20세기처럼 경제 분야 영향력이 막강하지 않은데도 관세를 무기로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은 무역전쟁에 돌입할 만큼 미국 상황이 절박하다는 것이다.
UC버클리 교수인 스티븐 코언과 브래드퍼드 들롱이 공저한 ‘현실의 경제학’은 20세기 후반 이후 미국 경제 정책의 실패상을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다. 과거 미국은 의류 완구 가방 생산에서 벗어나는 대신 항공 반도체 컴퓨터 등 첨단 기술로의 이전을 적극 추진했다. 한쪽에선 일본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정부들의 수출 주도형 경제개발 전략에 장단을 맞춰줬다. 이들 나라가 수출하는 제품들과 경쟁을 벌이는 분야에서 자원을 빼내 새로운 성장 방향, 즉 미래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간주되는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고부가가치 산업들이 두 세대에 걸쳐 배출됐다. 인공위성 등 첨단 항공·군수산업이 독보적으로 발전했고, 통신 소프트웨어 발달로 IT 대기업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미국은 이후 펀드나 파생상품 등 금융 관련 규제를 대대적으로 완화하고 부동산 거래에 불을 붙이는 정책을 폈다. 후기 산업사회에서 이들 분야가 뛰어난 생산성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 분야는 GDP 5% 증가라는 성과밖에 거둬내지 못했다. 반면 철강 조선 자동차 전자제품 등 아시아 제조업체들의 수출 총공세에 대한 미국의 타협 노선으로 제조업 비중은 1979년 GDP의 21.2%에서 2007년 12.0%까지 줄어들었다. 문제는 미국 내 공산품 수요는 줄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산품 수입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공산품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산더미 같은 빚을 쌓아올렸다. 소비 촉진을 목표로 저금리로 유인해 소비자들에게 빚을 지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지금 미국 경제는 강력한 재편 요구에 직면해 있다.
어찌됐든 미국의 구조개혁은 시작됐고, 트럼프 행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통상 압력을 가해올 것이다. 본격화한 미·중 무역전쟁도 양국 의존도가 큰 한국에는 무시할 수 없는 외부 변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생력이다. 독일이 통상전쟁 국면에서 동요하지 않는 것은 독보적인 산업경쟁력 덕이라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산업 규모에 맞는 금융산업 육성도 중요하지만 규제·노동 개혁 등을 통해 제조업 활력을 높이고 넘보지 못할 기술경쟁력을 키우는 게 시급하다.
한장희 경제부장 jh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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