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28
취약업종에 속하는 업체들이 자금난을 겪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차입에 의존해 지나치게 사업을 벌인 잘못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본론으로 들어가면 그들의 차입금 의존도가 커진 것은 경기가 좋았을 때 무턱대고 자금을 지원했던 금융기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금융기관들이 경기가 식자 자금을 빼내 기업들을 위기로 몰고 있다.
특히 최근엔 금리는 고사하고 특정업종에 대해선 아예 상대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양상이 짙게 나타나고 있다. 금융기관들이 사실상 신용조사 업무를 포기하고 있는, 다시 말해 은행 시스템이 마비됐다는 얘기다. 여기엔 정부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 중엔 산업은행의 급작스런 태도 변화도 지적된다.
지난해 4월 채권단 공동관리 체제로 넘어간 STX그룹의 경우 사실 강만수 행장 시절에는 정상화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던 회사였다. 산업은행이 자금을 지원하면서 구조조정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조선경기만 회복되면 정상화가 가능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그런데 행장이 바뀌면서 어느 날 상황이 180도 바뀌어 버렸다. 동양그룹이 법정관리로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제대로 지원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렇다고 과감한 구조조정을 이끌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자금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선 ‘산업은행 리스크’란 신조어까지 나오고 있다. 과거엔 산업은행이 자금을 지원하면 정부가 밀어주는 회사라 안전하다는 인식이 강했으나 이젠 산업은행이 먼저 손을 뗄 수도 있기에 오히려 긴장하고 주시해야 한다는 얘기다.
연기금 무용론도 마찬가지로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은 2012년 말 391조9676억원에서 지난 11월 말까지 424조원으로 늘었다. 연간으로 따지면 개략적으로 35조원 정도가 매년 국민연금으로 들어간다. 퇴직연금은 지난 연말 기준 84조2996억원으로 1년 전의 67조3458억원에 비해 16조9538억원이나 늘었다. 두 곳에서만 연간 42조~43조원 정도의 자금을 끌어간다. 이 외에도 공무원연금이나 사학연금 우정사업본부 등 법에 힘을 빌려 자금을 불리고 있는 연기금도 적지 않다.
문제는 이렇게 법으로 정해 강제로 기업이나 개인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가는 연기금이 정작 경제의 필요한 부분에 자금을 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국민연금이나 퇴직연금 등 연기금이 대기업의 돈줄이 됐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의 얘기다. 요즘엔 이들 연기금이 자금시장에서 안전판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강하게 나오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제도적으로 돈을 쌓아가는 국민연금이나 우정사업본부 등이 기업이 어려울 때 적극적으로 자금을 지원해 숨통을 터줘야 하는데 오히려 이들 기관이 먼저 자금을 회수하고 있다. 최근 황우여 대표의 지방 파산제 언급 이후 지방 공기업의 채권을 인수하던 이들이 자금을 싹 끊었다. 정부가 이들 기관에 준 가이드라인이 너무 타이트한데다 조금만 이상하면 자금을 회수해버려 루머에 휘둘리는 기업들의 자금난을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안전판 구실을 해야 할 연기금이 먼저 자금을 빼내기 때문에 민간금융기관들이 그들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고 털어놨다. 취약업종의 기업들이나 영세사업자들이 제도적으로 자금난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시장에선 당국이 경제를 안정화시킨다기보다 오히려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근 들어선 정부 내 힘겨루기가 상황을 악화시킨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게 부동산 대책이다. 국토부가 수없이 많은 대책을 쏟아냈지만 돈줄을 쥐고 있는 기획재정부나 금융위가 돈줄을 틀어막아 부동산 시장 뿐 아니라 건설경기 전반을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이는 금융기관의 수익성을 떨어뜨리고 수익성이 떨어진 금융기관은 충당금 부담 때문에 더 움츠러들어 기업의 자금난을 초래하고 이는 다시 금융기관의 수익성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현재는 금융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벤 버냉키 전 미국 FRB 의장처럼 소신을 갖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리더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기준금리 목표에 매여 시중에 자금난이 진행되는 가운데도 은행권에 자금이 남으면 계속 회수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금융당국대로 한국은행이 (연준처럼) 돈을 풀지 않는다고만 비판할 뿐 정작 금융시스템 내부에 산적한 문제들은 외면하고 있다.
회사채 신속인수제 한계기업 숨통 틔울까
지금 건설이나 조선 해운업종은 금융시장에선 이른바 ‘취약업종’으로 통한다. 가뜩이나 평가능력이 없는 금융기관들이 묻지도 보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기피하는 업종이다. 이들 업종에 있는 회사는 두둑한 배경이 없으면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나라야 어찌됐건 나부터 살겠다는 금융기관들이 이들 업종에 있다는 죄(?) 하나만으로 자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LIG건설을 비롯한 수많은 건설업체가 무너지거나 법정관리로 들어갔다. STX나 성동조선 등이 무너졌으며, 한진해운은 시숙회사에 운을 맡기게 됐다. 이들 회사만 문제가 아니라 계열에 관련업종 회사만 있어도 그룹 전체가 흔들릴 판이다. 은행들이 금리를 불문하고 손사래를 치며 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감독 당국이야 신용도 문제라고 우기겠지만 금융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다보니 정부는 지난해 7월 회사채시장 정상화 방안을 내놓았고 후속조치로 산업은행과 신용보증기금 회사채안정화펀드 등이 공동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실시하고 있다. 원래 회사채 신속인수제는 지난 2001년 유동성 위기에 빠진 하이닉스를 지원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도입했던 제도다. 금융기관이 차환발행을 해주지 않는 특정기업의 만기도래 회사채를 상환할 수 있도록 해당 기업이 발행한 사모사채를 산업은행이 사들이는 방식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2001년 당시 그룹 전체가 위기를 맞았던 현대그룹의 경우 이 제도를 이용해 살아났고 이후 은행관리를 받던 하이닉스는 SK에 인수돼 요즘 한창 잘 나가는 기업이 됐다. 신속인수를 요청한다는 것은 기업이 공개적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지만 금융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는 이처럼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산업은행 등 세 기관은 지난해 7월 신청기업에 대해 그해 8월부터 올해 연말까지 만기가 되어 돌아오는 공모 회사채의 차환발행을 도와줘 자금의 숨통을 열어주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현재까지 한라와 동부제철, 현대상선에 대한 지원이 확정됐고 최근엔 한진해운이 자금지원을 신청해 3월에 심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미 신청했던 한라와 동부제철, 현대상선 등 3사에는 지금까지 회사채안정화펀드에서만 572억원의 지원이 확정됐다. 전체 지원액은 이 펀드 지원금액의 10배인 5720억원이다.
회사 측이 지원을 요청할 때 만기도래 채권의 20%는 자력으로 상환해야 하며 나머지 80%에 대해 30%는 산업은행이, 60%는 신용보증기금이, 10%는 회사채안정화펀드가 인수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한라의 경우 최근 108억원의 전환사채 발행을 결정했는데 모두 회사채안정화펀드가 인수하는 것이었다. 회사로선 주식으로 전환될 경우 그만큼 자본금이 늘어나고 부채가 줄어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 이 때 자금을 지원하는 세 기관은 회사가 밝힌 자구계획을 보고 심사를 한다. 실제 지원할 지 여부는 세 기관이 1표씩 행사해 결정하는데 회사채안정화펀드의 경우 사전에 펀드에 기금을 출연한 5개 증권사와 4개 증권 유관단체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들 9개 기관 또는 회사의 3분의 2 이상 찬성을 받아야만 ‘지원 찬성’ 의견을 낼 수 있다.
신속지원 여부를 세 기관의 표결로 결정하지만 실제로는 회사의 자구계획이나 회생가능성에 대해 시장의 신뢰를 얻어야 지원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정진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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