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7
국내 4대 금융지주사는 2019년 모두 부동산신탁업 진출을 마쳤다. /연합뉴스
[한스경제=박종훈 기자] 은행에서 파는 금융 상품 중 하나로 취급받던 신탁의 영역이 크게 넓어지고 있다. 부동산 가격급등과 같은 상황에서 본격적인 자산관리서비스와 연계되는가 하면, 기업의 입장에선 새로운 자금조달 채널로 각광받기도 한다.
다만 새 수요발굴 상황에 낡은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이다. 실질적으로 신탁업을 규율하고 있는 자본시장법의 문턱이 높다는 의미다.
믿고 맡긴다는 의미처럼, 신탁은 위탁자인 고객이 금전이나 부동산, 유가증권 등의 재산을 수탁자(은행 등 신탁업자)에게 맡기고 수익을 배당 받는 서비스를 말한다. 신탁업자는 이에 대한 수수료를 받는 것이다.
올해 상반기 국내 4대 시중은행의 신탁 수탁고는 총 378조 1965억원이었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13.5%가 증가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올해 국내 신탁 시장은 1200조원을 돌파하며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 4대 은행의 신탁 수수료수익는 무려 3918억원에 달할 정도다. 1년 사이 5.7%나 증가했다. 특히 KB국민은행의 경우, 1085억원에서 1235억원으로 수수료수익을 13.8%나 늘리며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하나은행 역시 신탁 수수료수익이 상반기 1040억원에 달한다.
은행을 포함해 신탁 시장이 이처럼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령화 현상과 연관이 깊다. 과거엔 신탁이 부유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다양한 고객층을 대상으로 맞춤형 자산관리(WM)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면서 인식의 변화와 함께 신탁에 대한 관심도가 자연스레 높아진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 비해 고령화사회에 일찍 진입한 일본의 신탁 수탁고는 1000조엔, 약 9104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진다.
가계 차원에서 신탁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것과 함께, 최근엔 기업활동에 있어서도 신탁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가령 혁신기업이 디지털 수익증권을 발행해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을 한다든지, 중소기업이 보유자산을 신탁방식으로 유동화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금융연구원 이영경 전문위원은 ‘기업의 신탁 활용과 향후 과제’라는 보고서를 통해 “기업의 신탁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고 있음에도 신탁업은 자본시장법 규제로 인해 수요에 충분히 대응하고 있지 못하다”며 “특히 주식이나 회사채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중소기업이나 새로운 사업을 개발하는 혁신기업 등에서 신탁에 대한 수요가 큰데, 신탁업자 규제에 막혀 어려움이 많다”고 밝혔다.
혁신사업과 관련한 수요는 제1호 부동산 조각투자 사업자인 카사코리아가 좋은 사례다. 이들은 블록체인 기반 부동산 디지털 수익증권을 발행하고 자체 플랫폼에서 공모 및 유통을 하는 혁신서비스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사실 이런 방식은 현행법상 규제 대상이다. 자본시장법은 신탁업자에 대해 금전신탁에 한해 수익증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즉, 카사코리아처럼 부동산신탁에서 수익증권을 발행하는 것은 안 된다. 다행히 금융위원회로부터 규제샌드박스 적용 혁신서비스로 지정받았기에, 예외적으로 사업이 가능한 것이다.
신탁을 활용해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절차가 만만치않다. IBK경제연구소의 2022년 중소기업 금융실태조사에 따르면, 신용등급 미달 등으로 회사채와 같은 전통적인 방식의 자금조달이 어려운 중소기업들은 현재 외부 자금조달의 약 90%를 은행차입과 정책자금으로 조달하고 있다.
하지만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해도 부동산 등, 우량자산인 담보가 없다면 이도 여의치 않다. 다만 사업신탁이 가능하다면 새로운 자금조달원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지에서 활용하는 것인데, 기업이 일부 사업을 분할해 사업신탁을 하고 수익증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국내 자본시장법에선 신탁업자가 신탁받을 수 있는 자산은 제한돼 있다. 기업이 사업용자산·채무·무형자산 등을 포괄하는 사업 일체를 신탁업자에게 신탁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
기업이 자금조달 채널로 신탁을 활용하는 것에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보니 제도 개선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이에 금융위원회는 지난 2022년 10월 ‘신탁업 혁신방안’을 내놓았다. 신탁업자의 수탁가능재산을 일부 확대하고, 비금전재산신탁의 수익증권 발행을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안이 포함돼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신탁업자의 수탁가능재산을 확대해 채무와 담보권 등을 포함시켰다. 다만 신탁할 수 있는 채무는 부동산담보부 대출채무처럼 적극재산과 결부된 것에 한했다. 금전적 가치가 있고 전체 재산을 늘리는 것을 적극재산이라고 한다. 신탁계정 부실화나 채권자 권리침해 가능성 등을 고려해 순재산이 마이너스가 되는 채무수탁은 여전히 제한된다.
신탁법에선 신탁재산에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는 포괄주의 방식이므로, 어떤 재산이든 신탁이 가능하다. 그런데 신탁업자를 규율하고 있는 자본시장법은 수탁가능재산을 법조항에서 정하는 열거주의 방식을 따르고 이다. 결국 금전·증권·금전채권·동산· 부동산, 지상권·전세권·부동산임차권·부동산소유권 이전 등기청구권·그밖의 부동산 관련 권리, 무체재산권 등 7가지로 제한하고 있다. 이러한 취지는 신탁업자의 건전성 확보, 투자자보호를 위한 것인데, 막상 신탁활용의 차원에선 이것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금융 당국의 신탁업 혁신방안과 같은 내용으로 자본시장법이 개정된다면, 여기에 적극재산에 결부된 것에 국한한 채무와 담보권이 추가되는 것이다. 가령 기업이 제3자의 담보권이 설정된 공장부지 같은 재산을 신탁업자에게 신탁하는 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해외의 사례처럼 기업이 사업 자체를 신탁해 자금을 조달하는 건 여전히 가능하지 않다. 신탁업자를 규율하는 자본시장법에서 사업 자체를 수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탁업 혁신방안에서 수탁가능재산 범위를 넓혔지만, 이 부분은 들어가지 않았다.
이영경 전문위원은 “사업증권화 거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선 포괄담보제도 등, 여타 제도의 개선도 함께 이뤄질 필요가 있지만, 다른 제도적 어려움과 별개로 자본시장법상 수탁가능재산을 현재와 같은 열거주의 방식으로 유지하는 한 새로운 유형의 재산을 신탁하려고 할 때마다 법개정을 해서 수탁가능재산 항목을 추가하는 입법이 필요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법을 바꾸는 과정의 지난함에 대한 지적이다.
결국 많은 금융 관련 규제들이 비슷한 기조인 것처럼 리스크를 감안한 보수적인 접근인 것인데, 빠르게 바뀌고 있는 기업의 경영환경 등을 감안하면 제도가 좀 더 유연하게 개선돼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특히 위험요소의 모니터링과 관리가 실질적으로 가능하다면, 법조문에서 못받는 방식의 규제는 불필요하다는 의미다.
일본의 경우, 신탁재산에 대해 제한을 두지 않는 포괄주의 방식으로 법개정을 했던 것과 대비된다. 우리나라가 처음 신탁법과 신탁업법을 제정할 때 일본의 양 법을 크게 참조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양국의 법제 발전상황은 이처럼 차이가 상당하다. 이미 일본은 신탁업 활성화를 위해 2004년 규제를 완화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2008년 1월 미쓰비시 상사는 탄소배출권을 미쓰비시 UFJ 신탁은행에 신탁하고 수천톤 단위로 분할해 신탁수익권을 발행했다. 이 수익권 매매거래를 한 이후 다수의 탄소배출권 신탁 사례가 이어졌다. 이와 같은 탄소배출권 신탁상품의 수익권 매매거래 등, 새로운 형태의 재산에 대한 신탁이 유연하게 자리잡고 새 시장이 만들어지는 것은 과감한 규제 철폐의 덕이다.
금융 당국의 혁신방안 발표로 새로운 비즈니스가 시작된 것은 좋은 사례다. 대표적인 것이 뮤직카우의 사례다. 뮤직카우는 투자계약증권으로 인정돼 제재를 받은 저작권료참여청구권 조각투자 상품을, 신탁 수익증권으로 전환해 발행할 예정이다. 비금전재산신탁의 수익증권 발행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것이 혁신서비스 지정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이 한계다.
경제의 상황 변화와 발전에 따라, 혹은 산업과 기술의 고도화로 인해 우리 일상이 변화함에 따라 신탁의 과거와 오늘은 그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그렇다면 신탁업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시작돼야 한다. 과거의 인식 수준으로 현실을 옥죄고 있는 제도라면 마땅히 다시 숙고해야 한다.
©한스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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