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행사.건설사

주)MDM - 한국자산신탁(주) 문주현 회장.‘부동산 개발 미다스의 손’

Bonjour Kwon 2014. 1. 9. 09:21

어느 시대이건 선구자는 존재한다. 앞을 보면서 크게 생각하고, 변화 속에서 발전을,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아내는 사람들, 그들이 세상을 이끌어 왔다. 흔히들 (주)MDM 문주현 회장을 두고 ‘부동산 신화의 주역’, ‘부동산 개발의 귀재’ 등으로 일컬으며 부동산 업계의 선구자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를 선구자로 칭하는 것은 단지 그가 이룬 성공과 회사의 급성장 때문만은 아니다. 시련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새로운 가치 창출을 위해 늘 도전하며, 누구보다 먼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문주현 회장의 ‘큰 생각’과 ‘큰 마음’을 통해 많은 이들이 희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부동산 개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문주현 회장의 찬란한 성공신화와 나눔의 철학을 통해 우리 시대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되새겨본다.

 

 

지난해 국내 최초로 부동산개발회사가 부동산신탁회사인 한국자산신탁(주)을 인수하면서 부동산 업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이슈의 중심에는 부동산 개발 회사인 (주)MDM의 문주현 회장이 있었다.

한국자산신탁이 정부의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 의한 민영화 첫 사례 금융공기업인 만큼 세간의 이목이 그 어느 때보다 매각 결과에 집중된 가운데 은행이 인수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전문가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국내 최초로 개인 부동산 디벨로퍼가 최종 인수자가 되는 이변이 일어났고, 그 주인공인 문주현 회장과 (주)MDM에 수많은 언론과 대중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문주현 회장이 운영하고 있는 (주)MDM은 시행?마케팅?PM?컨설팅 등 부동산 개발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노하우를 축적해 온 종합부동산회사이다. 1998년 첫 발을 내딛은 이후 매년 굵직굵직한 분양을 성공시키며 대박 신화를 창출했고, 국내를 대표하는 부동산 개발회사로 급성장했다. 창립 이후 지금까지 총 분양금액이 약 13조 5천억 원, 총 분양세대 수가 약 3만 8천 세대, 총 컨설팅 의뢰 수가 약 1천 건에 달할 정도로 탄탄한 실적과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이번 한국자산신탁 인수로 개발, 마케팅, 컨설팅과 함께 신탁사업까지 총망라함에 따라 종합부동산그룹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이번 인수를 통해 다시 한 번 문주현 회장은 부동산 개발 분야의 명실상부한 스타 디벨로퍼이자 대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했다.

 

 

쇠는 두드릴수록 단단해진다

문주현 회장이 이룬 업적은 화려하다. 그러나 그 화려한 업적의 이면에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강한 의지, 그리고 역경을 극복하면서 체득한 값진 삶의 경험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저는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에서 5남 4녀 중 3남이자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중학교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졸업 후 3년간 집안 가업인 농사와 김?미역 양식을 도울 수밖에 없었죠. 쉴 틈 없이 보냈던 하루 하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껏 공들여 지은 농사를 하루아침에 쓸어버리는 여름의 태풍과 매서운 한겨울 삭풍인 바닷바람을 보며 실망과 절망을 맛보게 되었죠. 힘없이 쓰러지는 작물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은 자연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농사일을 접고 고향을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고, 1976년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전남 광주시에 있는 노동부 산하 광주직업훈련원 기계과에 제1기 무료 국비장학생으로 입학, 400명 중 1등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고졸 학력 동기가 실습교사가 되는 반면, 중졸이었던 문주현 회장은 보수가 낮은 공장에 취업할 수밖에 없는 학력의 벽에 부딪히게 되었고, 이 같은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검정고시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고, 하루 15시간씩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6개월 만에 합격할 수 있었죠. 하지만 그 때 입영 영장이 나오게 되었고, 군 제대 후 다시 학업에 도전하기로 훗날을 기약했습니다. 당시 아버지께서 제 손을 꼭 잡고 ‘넌 반드시 다시 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셨는데, 무엇보다 저를 믿고 응원해주셨던 부모님 덕분에 시련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었죠. 제대 후 스스로에게 약속한 대로 다시 학업에 매진했고, 1983년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회계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늦깎이 대학생이었던 문주현 회장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공부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면서 목표한 바를 이루려 노력했다. 그러나 시련은 다시 한 번 찾아 왔다. 목표를 정하면 그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매진하는 성격 탓에 먹는 것을 아껴가며 힘든 일과 학업을 병행했고, 결국 학업 도중 폐결핵이라는 병을 얻고 말았던 것이다. 투병생활을 하면서 대학을 다니다보니 경제적인 어려움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고 공부도, 공인회계사의 꿈도 접어야하는 것인가라는 갈등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그때 뜻밖에도 그의 사정을 알게 된 독지가가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어렵게 시작한 공부를 중도에 포기하려니 실망도 컸고, 갈등도 많았습니다. 이때 운이 좋게도 ‘봉신장학금’을 받게 되었던 것이죠. 당시 봉신장학금은 주로 서울대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주는 일종의 향토 장학금이었는데 봉신장학재단 이사장님이 제 사정과 학업에 대한 의지를 보고 특별히 기회를 주셨습니다. 덕분에 31살의 나이에 무사히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었고, ‘훗날 성공하면 젊은 시절 내가 받은 이 은혜를 조금이나마 사회에 돌려주겠다’라고 제 자신과 약속했습니다.”

 

 

 

발상의 전환, 세상을 놀라게 하다

31살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대학을 졸업한 문주현 회장에게 사회 진출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나이가 많다 보니 신입사원으로 채용하려는 회사들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취업은 좁은 문이었지만 계속된 도전 끝에 결국 나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1987년 3월 나산실업 경리과에 대졸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이후 부동산개발팀에 발탁되면서 문주현 회장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나산관광개발에서 주임, 대리, 과장으로 승진하며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문주현 회장은 입사 후 7년 동안 특진 7회를 거듭하며 ‘최연소 이사’로 승진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만이 가진 독특한 아이디어와 천재성, 일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이 낳은 결과였다.

“열심히 하는 것에 있어서는 자신 있었습니다. 주말도 반납하고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었죠. 그 만큼 인정도 받았고, 성과도 있었지만 일을 우선시하고, 건강을 등한시하다 보니 이사 승진 이후 두 번이나 쓰러지기도 했었죠. 어쩔 수 없이 고향에서 요양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지만 매일 천관산을 오르내리며 재기에 대한 의지를 다졌고, 건강해지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1년여 만에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회사에 복귀할 수 있었죠.”

이사라는 회사 중역의 위치에 있었지만 문주현 회장은 그 자리에 안주하면서 직원들의 보고를 일방적으로 받는 것 대신 직접 직원들과 함께 현장을 체험하고 몸으로 부딪히는 것을 선택했다. 틈만 나면 성공한 부동산 투자와 실패한 사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분석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누비고 다녔는데, 당시 나산그룹 직원들이 문주현 회장을 두고 ‘신입사원 같은 중역’이라고 일컬었을 정도로 그의 일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문주현 회장이 입사했을 당시 연 매출 200억 원 미만의 중소기업체였던 나산실업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주상복합 디벨로퍼의 선두주자로 떠오르며, 재계 30위권에 자리매김할 만큼 성장했다. 특히 1990년대 초 오피스텔에 주거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 대치동 미씨860오피스텔을 사흘 만에 분양 완료한 것이 도약의 발판이 되었는데 이 아이디어를 낸 주인공이 바로 문주현 회장이다. 이후 금융, 소비, 레저, 생활을 아우른 원스톱라이프시스템 등 그의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독특한 발상들이 사업에 반영되면서 회사는 성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사회 초년병의 아이디어와 패기를 높이 샀던 나산그룹의 안병균 회장님이 저에게 진두지휘할 수 있는 실권을 주셨고, 마음껏 사업을 펼쳐 보이게 밀어 주셨습니다. 소위 궁합이 맞는 오너를 만나서 일군 쾌거였다고 할 수 있죠.”

1990년대 초중반 나산그룹은 수많은 이름의 주상복합 개발 뿐 아니라 스포츠센터, 외식산업, 나산 컨트리클럽 등 숱한 아이디어를 다양한 사업에 접목시키면서 이른바 대박을 터뜨렸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문주현 회장이 있었다.

그러나 IMF 사태로 건설 경기가 최악에 이르면서 많은 회사들이 무너졌고, 이 같은 경제적 한파는 나산그룹도 피할 수 없었다. 문주현 회장이 상무로 재직하고 있던 당시 나산그룹은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고, 1998년 1월 회사가 문을 닫음과 함께 문주현 회장도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주)MDM 창업, 도약의 날개를 달다

나산그룹을 나온 문주현 회장은 다시 한 번 중요한 기로에 섰다. 안정적 지위가 보장된 편한 길을 선택할 것인가,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도전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이 경우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자를 선택한다. 더군다나 IMF 한파가 거세던 시기였기 때문에 후자, 즉 창업을 선택할 경우 ‘미친 짓’으로 치부되던 때였다. 그러나 문주현 회장은 모 회사의 사장 제의도,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도 뒤로 하고 과감히 후자를 선택했다.

“주위 사람들은 건설업계가 불황으로 하루걸러 부도가 나는 판에 무슨 분양회사를 창업하느냐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들이 창업을 두려워할 때 창업을 하면 그만큼 반사이익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부동산 개발의 밑그림을 내가 그렸으니 완성도 내가 하겠다’는 오기와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 능력을 스스로 시험해보고 싶은 욕구가 창업을 결심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죠. 한국 부동산 개발시장에 새 그림을 그리겠다는 각오로 1998년 4월, 부동산 개발회사인 (주)MDM을 창업했습니다.”

20평 남짓한 작은 사무실, 직원 두 명이 (주)MDM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후 (주)MDM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더없이 창대하고, 화려했다. 분당 미금역에 위치한 주거형 오피스텔 코오롱 트리폴리스를 ‘모두 분양’시키며 화려하게 데뷔한 이후 1999년 서초동 슈퍼빌, 2000년 목동 현대 하이페리온과 분당 현대 아이파크, 2001년 분당 파크뷰, 2002년 분당 두산파빌리온 등 내로라하는 개발사업의 마케팅을 모두 성공시켰다. 부동산업계의 주목을 받으며 승승장구 하던 중 회사의 운명이 좌우될 정도로 위기에 처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곧 평촌 대림 아크로타워, 상도동 포스코 더?, 검단 대림 e-편한세상 등 초대형 프로젝트의 분양을 성공시키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2007년 6000억 원 규모의 부산센텀시티 월드마크센텀 시행 및 분양을 성공시키며 다시 한 번 ‘미다스의 손’임을 입증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기에 과감히 도전, 큰 성공을 이룬 데는 문주현 회장의 치밀한 전략과 철저한 소비자 중심의 마케팅관이 주효했다.

“(주)MDM의 고속 성장을 두고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동산 분양이라는 마케팅 사업은 운에 따라 좌우되는 모험사업이 아닙니다. 리스크 관리를 최우선순위에 놓고 관련된 모든 요인들을 복합적으로 철저하게 분석, 일구어 내는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주)MDM은 분양에 필요한 제반 요인들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밑바탕으로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장 정직하게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소비자의 니즈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가치를 창조하는 것만이 사업 성공의 열쇠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고객이 원하는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 소비자가 찾을 수밖에 없는 상품을 만드는 것이 저희 회사의 가장 큰 경쟁력입니다.”

 

 

 

종합부동산그룹으로 비상하다

(주)MDM은 2009년 2,168억 원의 매출을 기록한 데 이어 2010년 2,337억 원의 매출을 달성하면서 매출액 2,000억 원대의 중견기업으로 자리매김 했다.

2011년 (주)MDM은 개발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금년 분양할 목표가 약 1조 5천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며, 주요 사업으로는 판교신도시의 푸르지오 월드마크, 문정동 가든파이브 오피스텔, 광교신도시 주상복합 사업 등이 있다.

판교 푸르지오 월드마크는 주거선호도가 가장 높은 판교신도시에 추진되는 사업으로 신분당선 판교역을 이용해 16분대로 강남 진입이 가능하다. 또한 알파돔(예정)시티, 판교중심상업지역을 도보권으로 이용가능한 판교신도시 최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어 쇼핑, 문화, 여가 등의 원스톱 라이프가 가능해 최고의 선호도를 보이고 있다.

문정동 가든파이브 오피스텔은 주변에 문정동 법조타운, 위례신도시, 장지택지지구, 강남 세곡 보금자리 등이 개발진행 중이어서 미래가치가 상당히 높은 사업이다. 특히 약 1,200세대의 대단지 오피스텔로 최근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1~2인 가구의 주거패턴에 맞는 컴팩트한 유니트로 차별화된 평면디자인을 선보일 계획이며, 입주자에게 고급주상복합이나 호텔에서 누릴 수 있는 휘트니스, 사우나 등의 부대시설과 싱글족들이 아침식사를 편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호텔식 식당, 북카페 등도 제공할 예정이어서 오피스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일것으로 예상된다.

광교신도시 주상복합은 광교신도시의 중심인 도청역 앞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 및 인근 수도권으로의 교통이 편리하며 경기도청, 에듀타운 등 광교의 주거, 업무, 상업이 집합된 지리적 앵커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광교신도시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47층의 랜드마크 아파트를 비롯해 테라스형 오피스텔, 아케드형 로드상가와 테마광장 등이 계획되어 광교신도시의 대표아이콘으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대외적으로도 문주현 회장의 리더십과 투명경영, (주)MDM의 성장은 인정받아 오고 있다. 2008년 서울경제 선정 ‘한국품질경영 우수기업’으로 선정되었고, 2010년에는 3월 ‘납세자의 날 모범납세자 기획재정부장관 표창’을, 9월 중앙일보 선정 ‘녹색건설산업 대상 중견건설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2월에는 포춘코리아 선정 ‘2011년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사회공헌경영부문’ 수상자로 문주현 회장이 선정된 바 있다.

문주현 회장은 격변하는 시장 속에서 새로운 사업기회와 사업다각화를 모색, 국내 부동산 개발사업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10년 3월 완료된 한국자산신탁(주)의 인수이다.

한국자산신탁(주)은 KAMCO가 75.2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 신탁 전문회사로서, 탄탄한 재무건전성과 안정적인 고객자산관리로 신뢰가 높은 공기업이었다.

“제가 신탁회사를 인수한 것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예상 밖의 이변이었겠지만, 오랜 동안 준비해 온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물입니다. 제가 계획하고 가고자 하는 큰 그림 중 이제 하나의 퍼즐을 맞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향후 국내 부동산 시장은 진정한 디벨로퍼와 부동산 금융회사가 부동산과 금융시장을 선도하고 지배하는 커다란 패러다임의 변화를 맞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응하고 도전하기 위해 국내 최고의 부동산금융 전문기업인 한국자산신탁(주)을 인수하게 된 것이죠. (주)MDM과 한국자산신탁(주)의 시너지를 통해 개발, 마케팅, 컨설팅, 신탁업무를 총망라한 최고의 종합부동산그룹을 만들어 나갈 계획입니다.”

이제는 디벨로퍼와 금융사가 서로 만나 개발사업을 주도하는 선진국형으로 전환할 시점이며, 한국자산신탁(주) 인수를 기점으로 금융과 개발을 결합한 선진국형 종합부동산그룹으로 도약하겠다는 설명이다.

한편, 한국자산신탁(주)은 민영화된 당해연도인 2010년 신탁보수 기준 수주실적에서 당당히 업계 1위의 자리를 차지했다. (주)MDM과의 부동산사업 관련 시너지가 제대로 발휘된 결과물이었다. 앞으로도 더욱 더 큰 시너지를 창출함으로써 국내 부동산업계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함께 나누는 세상은 아름답다

문주현 회장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또 하나의 단어는 ‘나눔’이다. 문주장학재단의 이사장인 그는 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을 돕기 위해 장학사업을 펼치는 것은 물론 다양한 곳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사업으로 얻은 수익을 이웃과 나누고 있다.

문주현 회장은 (주)MDM 창업 후 3년 만인 2001년, 10억 원을 출연해 문주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설립 후 10년간 총753명(대학생107명, 초?중?고생 646명)의 학생에게 507,635,690원의 장학금을 지원했으며, 경희대학교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특별 기탁금 2억 원을 출연한 바 있다. 현재 문주장학재단은 자본금 30억 원 규모의 장학재단으로 성장했다. (주)MDM의 자본금(10억원)보다 장학재단의 자본금이 3배라는 사실은 문주현 회장의 나눔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학교 재학시절 봉신장학재단의 도움 덕분에 공부를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감사함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죠. 훗날 성공하면 내가 받은 은혜를 사회에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던 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문주장학재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문주장학재단은 장학생 선발과정에 성적은 배제된다. 수도권과 고향인 장흥에 소재한 중?고교생들에게 주는 장학금은 결손가정이나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만 수여된다. 우수한 학생만이 장학금을 받는 현실의 역발상으로, 정말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힘을 실어 줌으로써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을 보듬고 싶은 문주현 회장의 소신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설립 조건에 따라 수익의 70%만 장학금으로 지원하는 다른 장학재단과는 달리, 문주장학재단은 일반관리비 지출을 하지 않음으로써 수익의 100%를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지급하고 있다.

“문주장학기금의 출연 규모는 100억 원이 단기 목표지만 회사 규모가 커질수록 계속 확대해 200억 원까지 늘리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리고 지원 범위 또한 확대해 예술, 문화, 이공계 학술 연구 등을 돕는 문화?예술재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영원히 내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재물은 빌려 쓰는 것이요, 내 것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을 따를 뿐입니다. 앞으로도 기업의 성장 속도만큼 기업의 이윤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소신을 지킬 생각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며 다져온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모든 순간에 열정을 쏟아내고, 진정한 나눔을 실천하는 문주현 회장. 그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문주현 회장은 결코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열심히 다시 도전하고 노력하는 것이 세상에 나온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성공에 만족하고 단지 상황을 유지하기에만은 그의 열정이 너무 크고, 그의 정열은 너무 뜨겁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역사를 만들어온 문주현 회장의 손에서 대한민국 부동산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 것을 기대해본다.

 

안유정 기자 (reporter1@s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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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DM 문주현 대표 (부동산개발사 최초로 한국자산신탁인수...) 20100401

     

    “보2010 3 11문주현(53) MDM 회장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몇 시간 전의 감격이 새록새록 솟구쳤다한국자산관리공사(KAMCO)와 한국자산신탁 주식양수도계약을 체결개발ㆍ마케팅ㆍ컨설팅ㆍ신탁업무를 총망라한 종합부동산그룹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한국 디벨로퍼의 선구자였던 그가 부동산개발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순간이었다그는 과연 ‘부동산개발의 미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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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깃을 명중한 감회가 클 듯하다.

    “첫 발을 적중했을 뿐이다남은 화살이 많다시험에 비유한다면 이제 겨우 1번을 풀었다고 할까안도감보다는 다음 문제를 풀기 위해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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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큰 의미가 있나?

    “부동산개발회사의 부동산신탁회사 인수는 한국 최초다제도권 안에서 전문적ㆍ체계적 개발사업을 통해 소비자에게 신뢰받으면서 다양한 방식의 개발사업을 펼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MDM의 풍부한 개발ㆍ마케팅ㆍ컨설팅 경험과 한국자산신탁의 튼실한 신탁업이 결합시너지효과를 내게 됐다.

    한국자산신탁은 KAMCO 75.24%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신탁 전문회사다. 2008 8월 발표된 정부의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 따른 민영화 첫 사례로서공기업 선진화 방안에 따른 민영화 규모로는 역대 최대다그는 공동 무한책임사원(General Partner)으로 참여하고 있는 대신MSB 사모투자전문회사(PEF)를 통해50%+1주를 인수실질적 운영주체자가 됐다인수 주식수는 총 134 7300인수 금액은 721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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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그림은?

    “한국자산신탁은 그동안 신탁업계에서도 충실한 재무 건전성과 안정적 고객자산관리로 신뢰가 매우 높았다그렇지만 단순 구도의 관리신탁 중심의 편협성으로 신탁시장 개방에 무방비 노출된 형국이다한국자산신탁의 강점에 MDM의 컨설팅ㆍ개발신탁을 접목진정으로 고객이 원하는 맞춤형 신탁사업을 제공하겠다개발사업 참여자 각자가 필요로 하는 금융(PF)ㆍ관리ㆍ컨설팅ㆍ마케팅 등 다양하고도 특화한 전문서비스를 제공보다 원활하고 안정된 개발사업이 가능하도록 하겠다

     

     

    창업

    1998
    부동산 분양시장에 한바탕 선풍이 일었다. IMF 외환위기체제의 암운이 드리운 그때코오롱그룹 분당 트리폴리스가 완전 분양됐다모두로부터 “미친 짓 아닌가”라는 시선을 받았던 그가 창출한 ‘대박신화’였다이해 4출범의 닻을 올린 MDM이 첫걸음으로 내디딘 부동산개발사업이 트리폴리스 분양이었다그 후는 화려했다내딛는 걸음마다 바람바람을 일으켰다이듬해 서초동 슈퍼빌, 2000년 목동 현대하이페리온과 분당 현대산업개발, 2002년 분당 파빌리온 등 잇달은 개가를 올렸다. 2007 6000억원 규모의 부산센텀시티 월드마크센텀 시행 및 분양 성공은 그 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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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어려운 시기에 창업은 무모하지 않았나?

    “나산종합건설 개발사업본부장 재직 시 ‘최연소 상무’라는 타이틀로 언론에서 각광받을 만큼 잘나갔다. 1998 1나산그룹이 쓰러졌다새로운 전기가 필요했다.‘한국 부동산개발의 밑그림을 내가 그렸으니 완성도 내가 하겠다’는 오기도 치솟았다노하우는 그 누구보다 풍부했고그만큼 자신있었다한국 부동산개발시장에 새 그림을 그리겠다는 각오로 덤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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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풍에 돛 단 듯’이란 표현이 생각난다매년 100% 이상 성장했다.

    “개발사업의 기본은 소비자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정확히 소비자의 욕구를 읽고 시장의 흐름을 재빨리 파악남보다 한 발 앞서 치밀하게 대응한 전략이 주효했다. MDM의 경쟁력은 마케팅이다철저하게 소비자 욕구를 파악한 뒤 소비자가 찾을 수밖에 없는 상품을 만든다실례로 월드마크센텀은 입지와 차별화한 상품 경쟁력으로 승부했다. 37 4개동 496세대 규모인 이 주상복합은 전세대 양면개방형 설계조망권을 극대화한 동 배치특화한 주민커뮤니티공간으로 센텀시티 내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MDM의 성과는 총분양금액( 135000억원)과 총분양가구수( 38000가구)에서도 입증된다.

    명성

    그는 유달리 별호가 많다대부분 부동산이 앞에 붙어 다닌다‘귀재’ㆍ‘박사’ㆍ‘미다스’ 등 천재성이 엿보이는 별명들이다그 근원은 나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그는 대졸 공채1기로 나산실업에 입사했다우리 나이 서른하나늦깎이는 처음부터 천재성을 번득였다독특한 아이디어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특진(7)을 거듭하며 입사 6년 만에 별(이사)을 달았다.

    -1990
    년대 초 오피스텔에 주거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오피스텔의 인기가 사그라들던 때 부동산 기획업무를 맡았다‘왜 오피스텔을 사무용으로만 쓰나잠을 자도 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발상의 전환그 효력은 대단했다신세대 미시족을 끌어들이겠다는 생각에서 붙인 대치동 미씨860오피스텔을 사흘 만에 분양 완료했다만능스포츠센터유아방,놀이방 등 당시로선 파격적 발상의 시설설치가 크게 어필했다.

    원스톱 라이프시스템도 또한 그의 아이디어다금융ㆍ소비ㆍ레저ㆍ생활을 두루 갖춘 편의성에 소비자는 환호했다.

    “늘 ‘왜’라고 되묻는다잘 되면 왜 잘 되는가안 되면 왜 안 되는가 나름대로 검증한다.

    그는 요즘 ‘천사’라는 별칭도 듣는다수재민 돕기불우이웃 돕기 성금 및 쌀 기부 등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실천걸식노인 지원단체인 다일공동체 밥퍼로부터 천사회원증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