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분식회계

[거짓말 하는 기업들3화. 美 엔론 사태로 돌아 본 '규제 길로틴'엔론의 거짓말..매출액 앞당겨 인식하는 국내 조선·건설사, 보수적 회계처리 요구돼

Bonjour Kwon 2016. 2. 11. 10:44


연재일 : 2016.01.11 by  김도년외 1명



분식회계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을 꼽자면 단연 미국의 '엔론 사태'다. 9·11 테러로 미국의 대외 정책 기조가 뒤바뀌었다면, 엔론 사태는 경제 질서의 구조 전환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저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엔론 사태는 테러공격보다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미국 경제시스템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제프 스킬링(Jeff Skilling) 전 엔론 최고경영자(CEO) ⓒ 연합뉴스

천연가스 운송 회사에서 금융회사로 탈바꿈한 엔론(Enron Corporation)의 분식 규모는 13억달러(우리돈 약 1조 5000억원)로 당시 분식을 주도한 경영자 제프 스킬링(Jeff Skilling)은 징역 25년형을 선고 받았다. 제프 스킬링은 처음부터 '엔론맨'은 아니었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 컨설팅의 경영전략 담당 컨설턴트로 엔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컨설팅 용역을 수행하다 엔론에 스카우트됐다. 1987년 경영진으로 영입된 스킬링은 엔론의 업종을 가스 운송업에서 에너지 거래업으로 바꾸고 새로운 회사를 인수합병(M&A)하고 사업 분야 확장에 나서는 등 외적 성장에 방점을 둔 경영전략을 제시했다.


엔론은 1985년 휴스턴 천연가스와 인터노스의 합병으로 탄생했는데 창업 15년 만에 미국의 격주간 종합경제지 포춘이 선정한 500대 기업 순위 7위에 오를 정도로 고속 성장을 했다. 1990년대 후반 월가의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엔론을 미국에서 가장 유망한 기업으로 평가했다. 회계 부정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한 기업들은 왜 하나같이 애널리스트와 저널리스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지 모르겠다. 그만큼 기업의 회계부정은 정보의 비대칭성이 만연한 환경에선 전혀 감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실물 경제에

금융이 결합하면?


엔론이 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연가스 유통시장에 금융의 요소를 결합한 것이 한몫했다.


1986년 이후 천연가스 생산에 대한 가격 규제가 해제된 것은 가스 생산자와 소비자에게 들쑥날쑥한 가스값에 대한 골칫거리를 떠안겼다. 이런 배경에서 엔론은 일종의 '가스 은행'을 탄생시켰다. 가스 생산자가 예금하듯 가스은행에 가스를 적립하고 소비자들은 대출받듯 고정된 가격을 지불하고 가스를 쓰는 방식으로 가스 가격이 갑자기 바뀌는 데 따른 위험을 줄여준 것이다.

즉, 국토가 넓은 미국에선 각 지역마다 별도의 에너지회사가 있는데 어떤 지역에선 일시적으로 에너지가 남아돌고 어떤 지역에선 부족한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엔론은 에너지가 남는 곳에선 남는 에너지를 적립하고 에너지가 부족한 곳의 소비자들이 적립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중개를 한 뒤 중간에서 수수료를 취했다.


얼핏보면, 매우 기발한 아이디어인 것 같다. 그러나 구조를 뜯어보면, 앞으로 일어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스 생산자가 안정적인 가격에 엔론에 가스를 팔고, 가스 소비자가 안정적인 가격에 엔론으로부터 가스를 산다면, 가스 가격 변동 위험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만약 실제 가스 가격이 오른다면 엔론은 소비자에게 시세보다 싸게 가스를 팔게 돼 손실을 볼 것이고 가스 가격이 내린다면 엔론은 생산자에게 시세보다 비싸게 가스를 사게 돼 손실을 볼 수 있는 구조다. 가격 변동 위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엔론이 고스란히 지고 가는 구조인 것이다.


엔론은 천연가스와 전기 분야에서 이런 방식의 중개 거래를 성공시킨 뒤 수도, 석탄, 광섬유, 날씨 파생상품, 신문용지 등 계속해서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우리말로 '문어발식 경영'에 나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사업 형태가 모두 비슷했기에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간 특정 상품을 공급하는 하드웨어를 구축하고 그 안에 소프트웨어만 가스, 물, 석탄, 신문용지 등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회계처리 기준도 매우 공격적으로 바꿨다. 보유 자산의 가치를 원가가 아니라 시가평가 회계로 인식, 자산가치를 부풀리기 쉽게 했다. 즉, 기업이 자산을 사들였을 때 자산을 사들인 가격, 즉 취득원가를 기준으로 자산 가치를 회계장부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시장가격, 즉 시가를 기준으로 기록했다는 의미다.


시장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데, 엔론은 기업에 유리한 시장가격만을 선택해 회계장부에 반영한 것이다. 가령 미래의 어느 날 미리 정해 진 가격으로 천연가스를 구입하기로 한 선물계약(先物契約)이 있다면, 계약에서 정한 가격을 무시하고 회사 입장에서 가장 유리한 시점의 시장가격으로 평가해 파생상품 거래 손실을 감췄다.

선물거래 : 미래의 일정 시점에 사전에 약속한 가격으로 물건을 사고 팔 것을 약속하는 것. 기업은 이런 예약을 맺어 시장 가격이 급변하는 위험을 줄인다.


엔론의 성과보상기준 역시 도발적이었다.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예상 이익을 미리 계산해 임직원들의 보너스를 챙겨주는 방식으로 바꿨다. 예를 들어 새로운 천연가스 공급 계약을 맺으면 그 계약으로 얻을 수 있는 미래의 예상 이익을 계산해 이중 일부를 보너스로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보너스에 동기 부여된 임직원들이 굶주린 사자처럼 새로운 계약을 사냥하러 다닌 덕분에 회사는 고속 성장을 했지만, 이는 분식회계의 불씨가 됐다. 앞으로 들어올 이익을 예상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는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엔론사 임직원들은 일단 이익 규모부터 부풀려 놓고 거액의 보너스를 챙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매출액 앞당겨 인식하는

국내 조선·건설사,

보수적 회계처리 요구돼


조선사나 건설사 등 우리나라의 수주기업들이 공사진행률을 부풀려 매출액을 미리 인식하고, 임원들은 거액 연봉 잔치를 벌이는 관행과 비슷하다. 조선사나 건설사들은 공사가 얼마나 많이 진행됐는지를 계산해 매출액을 인식하는데, 공사진행률을 높여 매출액을 미리 인식할 수 있는 회계 판단의 유연성(?)이 있다. 이렇게 수주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매출 실적을 앞당겨 인식하면 실적이 늘어난 만큼 성과급에 스톡옵션까지 챙길 수 있는 것이다.

고재호 전 대우조선해양 사장

실제로 대우조선해양의 고재호 전 사장은, 임기 중 수주한 해양플랜트 공사 손실로 2015년 2분기에만 3조원대 영업손실을 입었지만, 본인 임기 중 손실을 반영하지 않은 결과 2015년 1분기에만 3개월치 급여와 퇴직금 등으로 총 21억 5400만원을 받았다. 고 전 사장이 퇴임한 뒤 대규모 손실을 반영했고, 그 이후 선임된 경영진은 30%가 감원되고 연봉 절반이 깎였다. 회계에서의 손실과 이익을 반영하는 것을 왜 최대한 보수적으로 하라고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엔론은 또 은행으로부터 더 이상 돈을 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자산을 증권화해 시장에 파는 식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이른바 자산유동화증권(ABS)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자산유동화증권 : 부동산이나 주식, 채권, 기타 재산권 등 자산을 담보로 발행한 증권.

곧바로 현금으로 바꾸기 어려운 자산을 담보로 증권을 발행, 투자자들에게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팔면 긴요하게 쓸 수 있는 현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다. 유동화란 현금이 아닌 자산을 현금으로 바꾼다는 개념이다. 이렇게 하면, 현금을 곧바로 조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돈이 될 만한 건 뭐든지 담보로 돈을 빌린 것이기 때문에 기업으로선 빚 부담이 커지게 된다.

만약 빚을 갚지 못한다면? 자산유동화증권에 투자한 사람들까지 투자한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엔론은 이렇게 파산 직전에 이르렀을 때 ABS 방식으로 조달한 부채가 20억 달러(2조 4000억원)에 달했다. 이런 모습도 우리나라 금융당국의 감시를 벗어난 상법상의 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 발행 규모가 114조원까지 급증한 우리 현실과 많이 닮았으니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우리나라 금융당국은 자산유동화증권에 관한 법률에 따라 발행하는 ABS나 ABCP는 통계를 내고 감독을 하고 있지만, 상법에 근거해 발행되는 ABCP에 대한 감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상법은 금융당국 소관 법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빌리고, ABS를 발행해 빌리고..엔론은 이렇게 조달한 돈을 사업에 투자했지만, 대부분 수익을 거두지 못했다. 통신에서 20억 달러, 수도에서 20억 달러, 브라질 전기·수도 사업에서 20억 달러, 인도 발전소 건설 사업에서 10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주가는 띄워야 했다. 경영진이 스톡옵션을 가지고 있었으니 주가는 내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스톡옵션 : 회사가 임직원에게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일정 수량의 자사 주식을 사들일 수 있도록 부여한 권한을 주는 것.

임직원이 자기 회사의 주식을 갖고 있었으니 자기 회사 주가를 높이기 위해서는 분식회계로 이익 규모를 부풀려야 했고, 주주가치가 희석되는 유상증자 대신 부채로 자금을 조달했던 것이다. 외부 주주로부터 자본금을 끌어오는 유상증자로 자금을 조달하면, 외부 투자자들이 주주로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회사가 빚더미에 앉아 '좀비기업'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도 일단 자신의 주주권부터 지키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었다. 엔론은 파산보호 신청을 하루 앞두고 500여명의 직원과 11명의 임원에게 적게는 50만 달러(6억원)에서 많게는 500만달러(60억원)에 이르는 특별 상여금을 지급했다. 정부에 경영권을 내놓고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경영권을 행사해 보너스 잔치를 벌인 것이다.


또 최고경영자와 감사, 사외이사들은 회계문제에 대한 보고를 받은 직후 스톡옵션을 행사하거나 보유 주식을 시장에 파는 등 심각한 도덕적 해이도 보여줬다. 문제가 터질 것을 미리 알고 주식을 팔았다면, 이 주식을 사서 뒤늦게 회계부정 소식을 알게 된 개인투자자들만 손실을 떠안는 줄 알면서도 돈에 눈먼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시장 합리성 맹신 말아야..

규제 죄악시 하는

분위기는 위험


엔론 사태는 여러모로 우리나라 자본시장의 현재를 비춰볼 때 시사점이 크다.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경제주체들이 이익 극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가 1조 5000억원 규모의 분식회계와 파산이었으니, 기업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회계 감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언제나 시장의 합리성을 맹신한다. 엔론 사태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대우그룹 사태, 저축은행 사태 등 시장을 혼란케 한 분식회계 사건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시장에 대한 맹신은 버리지 못한다. 시장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 때문에 정부가 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해 개입해야 하고 시장의 탈선을 통제할 수 있는 규제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서는 것이다. 오로지 경제만 활성화되면 된다고 '규제 길로틴'을 외치며, 정부 당국자에게 규제의 '규'짜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만든 박근혜 정부는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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