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분식회계

한국판 '엔론 사태' 결말은 달랐다.SK글로벌의 거짓말.SK글로벌 분식회계는 SK증권과 외국계 투자은행(IB) JP모건의 이면계약이 발단

Bonjour Kwon 2016. 2. 11. 10:47


거짓말 하는 기업들 4화

한국판 '엔론 사태'

결말은 달랐다


연재일 : 2016.01.14 by  김도년외 1명


미국에선 사상 최악의 회계부정이라 일컫는 '엔론 사태'가 벌어진 직후였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판 '엔론 사태'로 불리는 대형 분식회계 사건이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엔론과 함께 'SK엔론'이란 합작회사를 설립한 바 있는 SK그룹의 한 계열사 SK글로벌에서 일어난 것이다.

ⓒSK그룹 홈페이지

SK글로벌은 우리가 알고 있는 SK네트웍스의 전신이다. 주유소와 주유소 편의점, 자동차 정비사업 등을 하던 SK상사가 SK에너지판매를 합병하면서 SK글로벌이 탄생했지만, 2003년 1조 5000억 원 규모의 분식회계 사건 이후 구조조정을 거쳐 SK네트워크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SK글로벌의 분식회계는 그룹 전체의 지배구조를 바꿔 놨다. 이후 SK그룹은 오랜 시간 동안 리더십의 부재 속에 놓이게 됐다. 사면과 수감을 반복하던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15년 박근혜 정부 아래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고서야 경영 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선 정부의 관심과 배려에 화답이라도 하듯 46조 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와 청년 일자리 창출 계획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2003년 당시 검찰 수사 결과 SK글로벌이 부풀린 자산과 이익은 총 1조 5800억 원에 달한 것으로 결론 났다. 부채를 누락한 것이 1조 1800억 원으로 가장 많았다. 또 해외법인의 손실을 아예 반영하지 않은 것이 2500억 원에 이르렀고 가짜 매출채권을 회계장부에 기록한 것이 1500억 원 규모였다.

2000년대 초반의 분식회계는 대우 사태에서도 그렇듯 매우 '무식한' 형태를 보인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을 받으면서 IMF는 우리 기업에 투명한 회계시스템을 요구했지만, 아직 이런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이라 모든 면에서 주먹구구식이었다. 오죽하면 분식회계를 자진 신고하면 처벌을 감경해주겠다는 정책까지 펼 정도였다.


이때의 분식회계는 대출을 받은 것을 아예 감추거나 해외 법인에서의 손실을 대놓고 감추기도 했다. 결혼을 앞둔 사람이 카드빚을 배우자에게 숨기거나 해외에서 도박을 하다 돈을 잃어버린 것을 아예 얘기하지 않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SK증권 손실 물어준

SK글로벌,

대국민 사기극의 전말


SK글로벌 분식회계는 SK증권과 외국계 투자은행(IB) JP모건의 이면계약이 발단이 됐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 본사 ⓒ연합뉴스

SK증권은 JP모건이 판매한 태국 바트화 관련 파생상품에 투자했다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바트화 폭락으로 2000억 원대 손실을 입었고 시장에서 퇴출될 위기에 몰린다. 당시 금융감독위원회는 전체 자산에서 영업용순자본비율(NCR)이 100%를 밑도는 증권사를 시장에서 쫓아내는 제도를 마련해 건전성 감독을 강화했다.

영업용순자본비율 : 쉽게 말해 증권사가 사업하는 데 쓸 수 있는 자기 돈이 전체 자산에서 얼마나 있는지를 나타내는 비율.

당시 SK증권의 영업용순자본비율은 100%는커녕 손실이 누적돼 자본금마저 갉아먹고 있는 완전자본잠식 상태였고 실적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때 JP모건은 병 준 뒤 약주는 격으로 SK증권의 구세주를 자청했다. SK증권 유상증자에 참여해 2405만 주를 주당 4920원에 인수, SK증권을 퇴출 위기로부터 구해낸다. 하지만, 알고 보니 JP모건이 투자한 SK증권 주식은 나중에 SK가 이자비용과 함께 다시 사들이기로 이면계약을 체결한 것이었고, 이 거래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SK글로벌의 해외법인들이 부담하게 된 것이다.

이면계약의 주요 내용은 JP모건이 투자한 SK증권 주식을 SK그룹 해외법인에 주당 6070원에 되팔 수 있는 권리(풋옵션·Put Option)와 SK그룹 해외법인이 같은 가격에 되살 수 있는 권리(콜옵션·Call Option)를 준 것이다. 즉, JP모건 입장에선 투자금에 이자까지 쳐서 받을 수 있었으니, 명목상으로는 주식에 투자한 것이지만, 실제 내용은 대출과 같은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SK글로벌 해외법인들은 이런 이면계약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시장가격보다 비싼 가격에 SK증권 주식을 되사주면서 손실을 떠안았다. 시장에서 1000원주고 살 수 있는 청양고추를 점원에게 속아서 3000원에 샀다면 2000원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서울 여의도 SK증권 본사 ⓒ연합뉴스

SK증권의 부실은 그룹의 오너인 최태원 회장이 책임져야 할 사안이지만, SK글로벌이 부담하게 됐으니 이는 SK글로벌 주주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런 중요한 이면거래를 뒤에서만 숙덕거리고 시장에 알리지 않았으니 투자자와 시장은 물론 국민을 완전히 속인 것이다.

이런 행위들은 당시 경제신문 '이데일리'에 보도됐고 이어진 금융감독원의 조사로 사실로 확인됐지만, SK그룹은 대기업 계열 금융회사가 망하면 국가신인도에 타격을 주었을 것이란 논리로 "당시로선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계열 금융회사가 망할 지경에 이르도록 제대로 된 검증 시스템 없이 파생상품에 투자해놓고, 온갖 불법 행위로 주주들에 손실을 끼친 행위를 한 당사자가 국가신인도를 운운할 자격이 있을까.

SK글로벌의 분식회계는 이렇게 불법적으로 떠안은 손실과 함께 그동안 누적된 손실을 어떻게 든 재무제표에서 감추려다 보니 일어난 사건이다. SK글로벌은 2001년 말 결산 당시 당기순손실을 감추기 위해 있지도 않은 매출채권 1500억 원을 회계장부에서 창조해냈다. 거래처에 판매한 상품이 없는데도 마치 1500억 원어치를 외상으로 팔고 돌려받을 돈이 있다고 적어놓은 것이다.


이런 식의 분식회계는 당시 SK글로벌의 외부 감사인이었던 회계법인과의 유착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미국과 유럽, 홍콩 등 해외법인에 자본금을 대줬다가 입은 손실을 줄이기 위해 해외법인의 자기자본(총자산-부채)을 뻥튀기한 뒤 2500억 원 규모의 지분법 평가손실을 사업보고서에서 지워버렸다.

지분법 평가손실 : 모회사가 다른 회사에 투자할 경우, 그 회사의 경영판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의 지분을 갖고 있다면(보통 투자회사의 20% 이상 지분을 보유한 경우) 그 투자회사의 당기순손실에서 지분율만큼을 손실로 인식하는 것.

가령 A기업이 B기업의 지분 20%를 투자했는데, B기업이 100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면, A기업은 100억 원의 20%인 20억 원을 지분법 평가손실로 반영해야 한다. SK글로벌은 이렇게 해외법인 투자해놓고, 해외법인이 JP모건으로부터 SK증권 주식을 말도 안 되는 비싼 금액으로 되사주면서 손실을 봤음에도 이 손실을 해외법인에 투자한 지분율만큼 계산해 손실로 반영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부채 1조 1800억 원을 누락한 것은 유전스(Usance)라고 하는 일종의 어음이다.


유전스 : 돈을 나중에 주겠다고 약속한 일종의 '단기 빚 문서'.

가령 우리나라의 A기업이 원재료를 해외의 B기업에 주문했다고 가정하면, A기업은 항구에서 원재료를 인수할 때 원재료 대금을 B기업 은행 계좌로 곧바로 보내지 않는다. B기업이 계좌를 개설한 은행이 제시한 어음만 받고 돈은 30일~60일 이후에 돌아오는 만기일에 은행을 통해 갚는다.

원재료를 산 기업 입장에선 돈을 갚기로 한 기간 동안 미리 받은 원재료로 상품을 만들고 이를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번 다음 어음을 갚으면 되고 원재료를 판 기업 입장에선 대금은 늦게 받아도 물건을 빨리 수출해 매출 실적을 올릴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이런 거래가 일어나는 것이다. SK글로벌은 이런 1조 1800억 원 규모의 유전스를 은행 서류를 위조해 전혀 갚아야 할 돈이 없는 것처럼 꾸몄다.


'닮은꼴' 엔론과

SK글로벌 분식회계..

책임자 처벌은 극과 극


따지고 보면 엔론 사태와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은 닮은 점이 참 많다. 먼저 회계감독의 사각지대에 있는 특수목적법인(SPC)이나 비상장사, 해외법인 등을 이용한 점이다. 엔론은 파트너십이라고 하는 특수목적법인에 부실 자산을 옮기는 형태로 부실을 숨겼고, SK글로벌은 해외법인을 동원해 그룹의 손실을 메워준 것이 비슷하다.


부실의 원인이 파생상품 손실에 있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엔론은 천연가스 등 에너지 상품은 물론 날씨 파생상품까지 취급했고, SK는 JP모건이 판매한 태국 바트화 관련 파생상품에 투자한 것이 화근이 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정욱 기자


하지만, 분식회계의 결말까지 닮진 않았다. 엔론의 분식회계를 주도한 경영자 제프 스킬링은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SK의 최태원 회장은 징역과 복역을 반복하다 2015년을 맞은 지금은 당당하게(?) 경영 일선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된 데다 최근 경제 상황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지만, 회계 투명성 측면에선 우리나라도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회계부정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수조원대 분식회계를 저지른 경영진을 솜방망이 처벌만 하는 회계감독 시스템 탓일 것이다.

ⓒ 이데일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